[LIFE] L211. 퇴직 리허설

휴직의 일상

by Mira



1. 현기증


출근길,

너무 어지러워서 쓰러졌다.

지하철 계단에서 구겨진 종이처럼 주저앉았다.

주변 사람들이 축 늘어진 나를 끌어올리는 동안,

정강이가 계단에 긁혀 피가 뚝뚝 떨어졌다.


손에는 작은 보드카가 든 쇼핑백이 있었다.

출장 다녀오며 동료들에게 줄 선물이었다.

그 와중에도

사람들이 오해할까 봐

보드카를 품에 꼭 끌어안고 있었다.


현기증은 나의 고질병이었다.

폭풍처럼 덮치고

거짓말처럼 멀쩡해지는 증상.

특별한 병명도 없고 약도 없다.


사람들이 구급차를 부르겠다는 걸 겨우 말리고

피가 줄줄 흐르는 다리로 출근했다.


미국이었으면 바로 ER로 가고 산재신청했을텐데.

그때가 월말 마감이었는데,

별거 아닌 내 일을

후배들에게 전가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 뿐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좀 아깝다.

그냥 병원가서 드러 누울 걸 그랬나.


다리에는 긴 상처가 생겼다.

나는 그것을 없애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나에게 준는 인증서 같았다.

적어도 내가 게으르거나 불성길한 사람은 아니라는.



2. 휴직


정신과에서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질병 코드가 적힌 진단서를 받으니

마음이 이상했다.


디스크까지 재발하면서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졌다.


휴직을 하면서

아무 계획도 세우지 않았다.

미라클 모닝 대신

내 맘대로 모닝을 상상했다.


출근을 위해 억지로 자지 않아도 되고

알람 없이, 몸이 깨우는 시간에 일어났다.

주 3~4회의 병원 치료,

좋아하는 음악,

그리고 하루 원고 두 편과 산책.


멀리 나갈 기운은 없어서

동네 주변을 다람쥐처럼 돌아다닌다.



3. 퇴직 리허설


어쩌다 보니

휴직은 퇴직 리허설이 되었다.


일이 사라진 하루는

빈칸이 아니라,

내가 직접 채워야 하는 칸이었다.


그 빈칸을 어떻게 사용할지에 따라

내 미래의 형태가 달라질 것 같았다.

휴직은

그 가능성을 한 번 미리 열어보는 시간이었다.



4. 몸이 깨우는 아침


회사 다닐 때

아침은 늘 출근을 위한 준비였다.

아침의 5분은 저녁의 5분과는

완전히 다른 시간이었다.


휴직의 아침은 다르다.

알람이 울지 않아도

몸이 나를 먼저 깨운다.


따뜻한 햇빛,

커피 물 끓는 소리,

고양이의 조용한 눈빛.

아침마다 번개처럼 사라지던 내가

같은 자리에 있으니

고양이도 어색해한다.



5. 데일리 루틴


대단한 계획이나 결심은 없다.


일어나서 샤워를 하고

그날 가장 끌리는 컬러의 옷을 입는다.

병원 예약 시간보다 3~4시간 먼저

근처 카페로 나간다.


매일 원고 두 편,

뉴스 읽기,

주식과 연금 계좌 리밸런싱,

앤드류 포터의 책들.


이런 일상을 반복하다 보니

퇴직 후의 하루가

어떤 구조를 가질지

자연스럽게 모델링이 되었다.


일의 리듬이 사라지면

또 다른 삶의 리듬이 시작된다.



6. 나를 지키는 시간


생각나는 일은

미루지 않고 바로 한다.

이것이 요즘 나의 슬로건이다.


미루지 않으니

급한 일도 없고

찜찜하게 쌓이는 일도 없다.

회사라는 핑계를 댈 일도 없다.


시간을 관리하는 것은

일의 기술이 아니라

삶의 기술에 가까웠다.


예상치 못한 불안,

갑작스러운 공허,

계획이 어긋날 때의 조급함도 찾아왔다.


그 감정들을 그대로 버텨내고 나니

시간을 주도적으로 쓰는 능력이 자랐다.

회사에서 배운 근력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근력이다.



7. ‘하고 싶은 일’로 시작하는 하루


퇴직의 가장 어려운 점은

일이 사라진 하루를

낯설지 않게 받아들이는 일인지도 모른다.


휴직 동안

그 낯섦과 여러 번 마주했고

조금씩 적응했다.


“오늘 무엇을 하지?”라는 질문 앞에서

조급함이 아닌 여유를 선택하는 연습.


“해야 한다”가 아니라

“하고 싶다”로 하루를 설계하는 연습.


퇴직 후의 하루는

이런 작은 선택들의 합으로 만들어질 것이다.



8. 퇴직 리허설


휴직은 끝나도

퇴직의 리허설은 계속된다.


나는 여전히

미래의 나를 위한 루틴을

매일 조금씩 다듬고 있다.


이제는

회사의 리듬이 아니라

나의 리듬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연습을 하는 중이다.

조용한 연습, 작은 의식,

나를 지키는 시간들을 만들다 보면

어느새 퇴직은 나를 통과하고 있을 거다.

작가의 이전글[LIFE] L181. 프로이트를 닮은 GPT(1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