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슬픔의 볼레로
1. 출근복은 전투복
30년 동안 출근복은 늘 전투복이었다.
사람들은 관심 없는 척하면서도
타인의 이미지를 아카이빙 한다.
나도 ‘내가 느끼는 방식’만큼
‘내가 보이는 방식’을 의식했다.
시뮬라시오, 시뮬라씨에
스타일은 일종의 ’ 자기 정의,
나를 사회적 코드로 다듬으면서도
나의 취향과 그날의 바이오리듬도 포기할 수 없었다.
2. 파자마가 전투복
요즘은
병원 외에는 거의 집에 머문다.
초저녁에 잠들고 새벽 한두 시에 깨서
글을 쓰고, 리밸런싱을 하고,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대로 움직인다.
전투복도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이제는 파자마, 라운지룩,
몸을 가볍게 따뜻하게 감싸는 옷이
내 작업복이 되었다.
혼자 있을수록
내 모습이 내 마음에 들도록.
3. 어떤 느낌일까?
출근복은 타인을 기준에 둔 옷이었다.
‘이렇게 보일까’가 중심에 있었다.
요즘은
이걸 입으면 나는 어떻게 느껴질까?
이 질문에만 집중한다.
스웻셔츠를 컬러별로 구비하고
바이오리듬에 맞춰 색을 고른다.
레드를 입으면 에너지가 올라가고
그레이를 입으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핑크나 스카이 블루 같은 마카롱 컬러를 입으면
생각도 말랑말랑.
4. 삶의 기본값 업데이트
집에 있는 시간만큼
눈에 보이고 피부에 닿는 것들이 중요해졌다.
마치 코로나 시절로 돌아간 듯한 일상이다.
베딩을 좋아하는 리넨으로 바꾸고,
(리넨이 실크보다 비싼 듯 @.@)
낡아서 민망했던 살림살이를 하나씩 바꾼다.
샤워가운과 잠옷을
‘새벽 작업복’이라고 부르게 된 것도
모두 같은 흐름이다.
남에게 보이는 것보다
내 감정의 온도를 살리는 소비.
야금야금 취향소비를 하는
즐거움이 있더라.
5. 노 모어
반대의 흐름도 있다.
아무리 세일해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품목들.
화장품은
집에 있는 것들만으로도 1년은 충분.
습관처럼 샀던 마스크팩보다,
수분 크림에 좋은 허브 오일을 섞어
얇게 레이어링 하며 덧바른다.
건조한 겨울을 위한 최고의 보습템.
메이크업에서 마스카라는 사라지고
립밤과 핸드크림이 중요해졌다.
가방과 신발도 그렇다.
신상은 예쁘지만
내 삶에 더 이상 들어올 거 같지는 않다.
중고샵에서 만나는 캐시미어는
과감하게 산다.
앞으로 30년 거뜬히 함께할 수 있는 물건들만
내 옷장에 들어온다.
캐시미어를 사랑하는 취향이 같은
엄마 옷을 함께 사는 것도 좋다.
6.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
영화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 가 떠오른다.
그 음악과 함께.
기쁨과 피로, 사랑과 회복이
조용히 반복된다.
향초와 화분,
아무도 보지 않지만
내 몸에 닿는 것들을 업데이트하는 소비.
진정한 럭셔리다.
나를 살리는 한 겹의 기쁨,
나를 지켜주는 아주 작은 사랑.
회복을 바라는 간절함.
솔직히 말하면, 꽤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