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 취향에 대한 유감
1. 국민템
국민템은 단순히 ‘많이 팔린 물건’이 아니다.
그 뒤에는 집단적 안심이라는 정서가 있다.
“남들도 다 사니까.”
“나만 이상한 선택을 하지 않겠지.”
이 문장들의 구조에는
몰취향적 성격이 숨어 있다.
취향이란 본래 개인의 삶의 구조에서 비롯되는데,
국민템은 그 구조를 대부분 생략한 채
대중의 평균값으로 대체한다.
그래서 국민템은 언제나
“소유 = 나의 취향”이 아니라
“소유 = 집단 소속”에 가까운 신호를 갖는다.
2. 나는 왜 그 흐름이 불편했을까?
나는 어려서부터 “같은 것”을 싫어했다.
그게 반골기질이라기보다는
형태가 주는 정서적 단서 때문이다.
소유 방식이
나의 정체성을 설명해주지 못한다면
나는 그 물건을 들 때 늘 어색했다.
국민템을 보면
그건 나의 것이 아니라,
‘다수가 이미 선택한 길 위에 올라탄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 감각이 나와 맞지 않았다.
인스타에서 '쇠테리어'가 유행하면
공간을 전부 스틸로 꾸미는 행태가 나는 의아하다.
새로운 것과 오래된 것의 믹스매치를 즐기는 나는
그렇게 머리부터 발 끝까지 통일된 스타일에 흥미가 없다.
3. 국민템을 피해서
그래서 나는 자연스럽게
그런 아이템들과 거리를 두고 살았다.
몽클레어 패딩
어그 부츠
스마트워치
치마 레깅스
노스페이스 눕시 패딩
샤넬 클래식 플랩
버버리 패딩
나이키 조던
아디다스 가젤
이런 유행템에는 나만의 결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유행을 피하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내 삶의 구조에 맞지 않는 것에 마음이 가지 않는다.
4. 그 시절의 국민 가방들
국민 가방의 계보를 떠올리면
잔스포트 배낭이 있다.
학교를 가는 길에 모두가 그 가방을 매고 정문을 향해 걷는 모습은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키플링과 레스포삭도 있다.
당시의 이동성과 속도,
가볍고 기능적인 시대 감각이 만든 형태들이다.
하지만 나는 그 가방들에 마음이 가지 않았다.
그 대신 에르백에 매료되었다.
에르백은 완벽한 사다리꼴 형태로
조용했고,
가죽은 단정하고
색은 절제되어 있었다.
그건 유행을 회피한 선택이 아니라
그 시대의 구조와 나의 구조가 처음부터 어긋나 있었기 때문이다.
사물은 종종 삶의 방식을 드러낸다.
나는 단정한 구조를 좋아했고,
그 취향은 대량 생산된 ‘대중적 이동성의 가방’과 맞지 않았다.
수십년이 지나 유행하던 브랜드는 다시 반짝 등장하는 정도지만
에르백은 몇배가 오른 가격에도 여전한 사랑을 받고 있다.
5. 텀블러 시대
나는 회사에서 종이컵에 커피를 마시는 것을 싫어했다.
환경문제에 대단히 문제의식을 가져서가 아니라
종이컵에서 나는 냄새에 커피향이 뭍혀 버리는 게 싫었다.
그래서 딘앤델루카 텀블러를 사용했다.
그때만 해도 ‘굳이 왜?’이라는 시선이 있었다.
스탠리컵의 인기를 보며 생각한다.
그 지나치게 크고, 미국적인 곡선과 색감,
내 작은 손에 비해 너무 우람한 형태.
나는 대신 일본에서 산
작고 단정한 텀블러를 쓴다.
그 크기와 무게감이
내 일상의 구조와 정확히 맞는 선택이기 때문이다.
6. 국민템의 몰취향
국민템은 편리하지만
그 편리는 종종 개인의 감각을 압축한다.
“고민 없이 사도 된다”는 말은
생각과 관찰을 생략하는 방식이다.
고민이 빠진 취향은
금세 집단 취향으로 변한다.
집단주의적 성격은
물건을 동일하게 만들고,
소비자도 동일한 구조 안에 두려 한다.
이때 개인의 미묘한 감각은 사라진다.
그 구조가 나와 맞지 않기에
나는 국민템에서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7. 나에게 필요한 건 ‘다름’이 아니라 ‘구조’다
나는 남들과 다르기 위해 국민템을 피한 것이 아니다.
내 삶에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속도와 무게가 있고
그것과 어긋난 물건이 들어오면
일상의 심미적 균형이 흔들린다.
국민템은
모두에게 맞는 것을 목표로 만든다.
반면 나는
나에게 맞는 것을 목표로 고른다.
결국 취향이란
삶을 지탱하는 하나의 구조에 가깝다.
디자이너의 본능인지
남들이 다 하는 거에는 흥미가 없고
나에게 맞는 방식으로 튜닝하는 것에 열정이 생긴다.
8.사복세대
생각해보면 나는 국민템 이전에
이미 더 큰 집단적 상징을 피해온 셈이다.
나는 중·고등 6년 동안
교복을 입지 않은 마지막 세대였다.
나 이후로 교복이 다시 부활했다.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만약 누군가가 매일 같은 옷을 입으라고 강요했다면
나는 아마 등교를 거부했을 것이다.
그 시절의 나는 그저 편한 옷을 고집한 게 아니라
집단적 동일화에 대한 본능적 저항을
이미 몸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집단이 함께 하는 일에서
질문할 수 없는 분위기를 늘 버거워했다.
그런 분위기에서 나는 늘 나를 잃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 회사생활은 오죽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