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Long Time
1. after long time
나는 오랫동안 나를 이렇게 생각했다.
게으르고, 목적도 없고, 야망도 없는 인간이라고.
주말이면 침대에서 거의 일어나지 못했고
월요일이면 가면을 쓰고 무대에 오르듯 출근했다.
퇴근 후엔 맥주로 하루를 지웠다.
이 모든 증상이 우울증 때문이라는 걸 몰랐다.
2. 내가 왜 여기 있을까
정신과 대기실.
내가 왜 여기 있을까?
‘내가 이 정도인가?’
‘정말 병인가? 게으름? 꾀병?’
아니면 그냥 나는 망가진 사람인가.
타인의 시선보다
내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더 견디기 어려웠다.
그날의 나는
오랫동안 쌓아 둔 자기혐오와 마주하고 있었다.
서글프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했다.
3.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를 죽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연로한 부모님.
그리고 고양이들.
누가 그들의 하루를 챙기고
누가 그들의 밥그릇을 채울까.
그들은 내가 세상에 내리고 있는
유일한 닻이 되어 있었다.
내가 병원을 찾은 이유는
나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버릴 수 없어서였다.
그건 내가 가진 가장 강한 생존의 힘이었다.
4. 닫힌 문 앞에서
4년 전 겨울,
길을 가다가 정말 그대로 신경이 터져버릴 것만 같아서 간판만 보고 찾아간 정신과 병원.
그런데 이미 3개월치 예약이 끝났다고 했다.
간호사는 귀찮은 듯, 나를 대했다.
그럼, 저처럼 급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응급실로 가야 줘, 뭐...
응급실?
그 선까지 밀리고 싶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 목동의 병원들에 전화를 돌려
겨우 예약 가능한 곳을 찾았다.
병원 문 앞에서 한동안 서 있었다.
그날, 나는 죽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살고 싶은 사람이었다.
5. 회복의 질감
몸이 약에 적응하기까지 6개월 이상 걸렸다.
어떤 날은 몸이 축 처지고,
기절하듯 쓰러지고,
말똥 말똥한 상태로 밤이 지나가고.
상담은 어려웠다.
낯선 의사에게 말을 해야 하는 시간은 불편했다.
무슨 얘기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반년이 지나니까
마음보다 뇌가 먼저 회복되는 기분이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회복은 생각보다 오락가락하고
생각보다 더 느린 질감이었다.
아무렇지도 않았다가
또 땅속으로 푹 꺼지는 기분이 반복되었다.
컨디션도 함께 널을 뛰어서 늘 불안하게 잠들었다.
내일 출근할 수 있을까?
6. 하루의 경계
휴직 후 처음 3주는
2~3시간마다 잠에서 깼다.
‘쉼’의 기술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쉰다는 게 뭐지?
정확히 뭘 하는 게 쉬는 거지?
머리는 쉴 새 없이 풀 가동되어 밤새도록 각성 상태였다.
내가 한 유일한 결심은
아침마다 샤워하기였다.
외출이 없어도 이유를 묻지 않고
뜨거운 샤워로 잠기운을 씻어 낸다.
바디로션에 로즈 허브오일을 섞어서
발부터 꼼꼼하게 몸을 돌본다.
새 양말과 속옷을 입고
그날의 기분에 맞는 컬러의 옷을 입는다.
저녁에도 다시 샤워하기.
하루의 시작과 끝을 위한 루틴을 만들었다.
오직 그 단순한 과정으로
하루의 리듬과 경계를 만들었다.
7. 감각의 회복
나에게서 나는 은은한 로즈향에 기분이 부드러워진다.
건조한 겨울엔 하루 두세 번 마스크팩을 하면서
피부관리를 한다.
스스로의 감각을 깨우는 작업이었다.
나를 돌본다는 건
드라마틱한 변화가 아니라
손끝에서 시작되는 아주 작은 연습이었다.
8. 나에게 예뻐 보이기
침구를 가장 좋아하는 리넨으로 바꾸고
예쁜 파자마를 샀다.
이전에는 엄두가 나지 않는 가격이지만 상관하지 않는다.
집에만 있어도 일상복으로 갈아입었다.
나에게 예뻐 보이고 싶어서.
단정하고 감각적인 자기 돌봄은
스스로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유용한 방식이다.
팔로산토 향초를 켜고
커피를 내린다.
허브화분을 돌보고 물을 준다.
고양이 밥을 준다.
9. 포터의 세계로 다이빙
병가를 내고 제일 먼저 한 일은
앤드류 포터의 책을 잔뜩 사는 것이었다.
하지만 책장을 열면 집중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필사를 시작했다.
딱 하루 한 페이지.
새벽의 어두운 막막함이 올라오기 전에
포터의 문장으로, 그의 세계로 다이빙.
느린 호흡으로 문장을 따라 쓰다 보면
신경이 안정되는 기분이 든다.
10. unknown
포터는 모르겠지.
동양의 어떤 여자가
그의 문장에 기대
하루를 버텼다는 것을.
문장을 따라 쓰는 동안
내 안의 혼란이 잠시 멈추었고
뇌가 천천히, 조용하게 깨어났다.
포터의 문장에는 무슨 일인가로 상실을 겪은 사람들의
쓸쓸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손 쓸 수 없이 망가진 관계,
막막하기만 한 심정의 풍경
회상과 의심,
상실과 고독의 문장들.
그 세계 속에서 나는 고요해진다.
11. 다시, 나를 위해
나는 아직 회복 중이지만
예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나를 바라본다.
오랫동안 잊혀 있던 나를
다시 불러오는 중.
다시, 나를 위해
살아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