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지러움에는 지르텍
역할과 책임이 사라진 자리에
공허한 마음과 지루함이 먼지처럼 쌓인다.
매일의 루틴을 다 해도
아직 오전 8시.
살아야 할 하루는
거대한 코끼리처럼
내 앞에 버티고 서 있다.
어려운 영어책을 붙들고
중학생처럼 노트를 하며 끙끙댄다.
내 몸을 잘 돌보는 루틴도
하루도 빠뜨리지 않는다.
외출에 대한 의욕은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
출근이라는 강제 외출이 사라지자
굳이 나가야 할 이유도 함께 사라졌다.
집에만 있으면 좋을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그러고 나니
답답함이 조금씩 쌓인다.
당근으로 불태우던
소비와 산책에 대한 열정도
한 달쯤 지나니 사그라들었다.
소비욕구도 부릴 만큼 부리고 나니
통장의 차가운 경고를 받고
조용히 움츠러든다.
의욕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하루는 흘러간다.
소소한 이사 준비나
실업급여 신청 같은 일을 마치고 나면
나는 다시 코끼리와 마주한다.
정신과 상담도 성실히 받고 있고
경과가 좋아 약도 많이 줄였다.
이건 분명한 발전이다.
나는 오랫동안
발전, 성과, 목표 같은 지표로
움직여 온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아무 목표도 없는 하루 앞에서
불안해진다.
하루하루 잘 지내는 것이
퇴직 후의 목표가 되었다.
돈 때문에 일하지 않아도 되는 여건이라는 점은
분명 다행이다.
그럼에도 ‘일’이 사라진 자리의 공백은
예상보다 크다.
셀프 프로젝트라고 이름 붙였던 일들은
하나도 진전이 없다.
어느 순간,
그냥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이런 것이 퇴직자의 심리 상태일까.
워낙 소속감을 좋아하지 않던 성격이라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다는 기분은
그다지 나쁘지 않다.
이전보다
스스로 챙겨야 할 것들이 늘었지만
그 정도는 괜찮다.
건강보험이 지역가입자로 변경되었다는 문자를 받고
그제야 정말 퇴직을 했다는 실감이 들었다.
부모님과 함께 전환되었는데,
한 달에 얼마나 나올까.
이전보다 더 나올까.
확인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 미루게 된다.
회사 인트라넷으로
간단히 확인하던 것들을
이제는 하나하나 알아봐야 한다는 걸
뒤늦게 실감한다.
하긴,
그곳도 그다지 친절하지는 않았다.
괜한 감상에
빠지지는 말자.
그렇다면 우울증은 아닌데,
이 불안과 지루함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니
이런 시간은 평생 처음이다.
휴직은 언제나
다시 출근하기 위한 보험 같은 시간이었다.
머릿속에서는 늘 엑셀이 돌아갔고,
플랜 A, B, C가 동시에 가동되고 있었다.
그 사고 회로가
어느 순간, 딱 멈추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곰팡이처럼 불안이 피어났다.
이건 단순한 심리 상태에 그치지 않았다.
온몸이 가려웠다.
오직 ‘가렵다’는 감각만이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정신과 상담을 하니
가려움은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지며 나타나는
신체화 증상이라고 했다.
지르텍을 먹으니 금세 가라앉았다.
그렇구나.
내가 지금 예민하구나.
그 사실을 인지하고
그 상태를 딱 그만큼으로 수용한다.
그 이상의 과장도,
불필요한 해석도 덧붙이지 않는다.
너무 시리어스 해지지 않기로 한다.
인생을 거대한 농담쯤으로 생각하면
이 정도는 가벼운 유머로 넘길 수 있다.
참,
인생은 별별 감각을 다 던져준다.
나는 오늘도,
나이스 캐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