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L287. 운명의 내러티브

우리는 왜 이야기를 만드는가?

by Mira



운명의 내러티브


사주, 별자리, 타로, 신점 말고도 수많은 종교들이 운명을 이야기한다.


그 어느 것에도 믿음은 없지만,

완전히 무시하지도 않는다.


내 운명이 궁금해서라기보다

사람들이 왜 그런 걸 만들어왔는지 알고 싶다..


사주와 별자리는

태어난 순간이라는

이미 고정된 좌표를 근거로 삼는다.


이미 정해진 값을 놓고

그 위에 해석을 얹는 방식이다.


반면 타로는 다르다.

카드는 완전히 랜덤으로 뽑힌다.

그래서 더 수상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랜덤 한 카드 배열에서

자기 인생을 읽어낸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타로의 핵심은 카드가 아니라

해석이다.


질문하는 사람이 던진 질문,

타로 보는 사람이 가진 언어,

그리고 그 순간의 이미지가

하나의 이야기로 엮인다.


맞아서가 아니라,

그럴듯하게 연결되기 때문에

사람들이 동의한다.


사주든, 점성이든, 타로든

사람들이 그걸 소비하는 이유는 같다.


운명을 알고 싶어서라기보다

지금의 상태를 설명해 줄 이야기가

필요해서다.


삶이 너무 랜덤 하고,

너무 무차별적으로 폭력적일 때

사람은 설명을 찾는다.


“이건 내 잘못이 아니다”

“이 시기는 지나간다”

“나만 이런 게 아니다”


그 말을

누군가의 입을 빌려

듣고 싶은 순간이 있다.


나는 종교도

비슷한 구조라고 생각한다.


종교는 진실이기 이전에 기능이다.


불안한 인간을 달래고,

혼자인 존재에게

이야기를 건네는 장치.


유럽의 오래된 교회에 들어가면

신에 대한 숭배심보다는

이 허구의 이야기를 발명하고

수백 년 동안 지켜온

인간이라는 종에 대한

경외심이 먼저 든다.


삶이 그만큼

쓸쓸하고 잔인했기 때문에

이야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나는

그런 것을 믿기보다는

인간이 삶을 버티기 위해

만들어온 이야기의 한 형태로 본다.


그리고 가끔은

차라리 신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솔직한 마음도 든다.


모든 게 랜덤이 아니라,

내 고통에도

이유가 있다고

믿을 수 있다면.


그래서 요즘의 나는

운명을 묻기보다

이런 질문을 더 자주 한다.


사람은 왜

이토록 설명을 필요로 하는 존재일까.


그리고

설명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문학을 생각한다.


오늘의 독서는

그 질문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그래서 나는

사주나 타로를 믿지 않으면서도

그걸 찾는 인간의 마음에는

늘 관심이 간다.


운명이라는 단어라도 붙여야

견딜 수 있는 순간들이 있기 때문이다.


삶은 생각보다

논리적으로 전개되지 않는다.

노력과 결과가 비례하지도 않고,

선함이 보상받는 구조도 아니다.


어떤 사람은

재능과 환경을 모두 가졌는데도

무너지고,

어떤 사람은

별다른 이유 없이

끝까지 살아남는다.


그 차이를

순전히 선택의 문제로만

설명하기에

인생은 랜덤이다.


그래서 인간은

이야기를 만든다.

설명되지 않는 것들을

서사로 엮는다.


알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묻는다는 것.


어쩌면 그게

인간이라는 종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나 역시 그 질문에서

자유롭지 않다.


별자리에 내 수명이 나오는지

궁금해한 적도 있고,

인생이 생각보다 짧다면

지금의 선택들이

달라졌을까 상상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늘

미래를 준비하면서도

보상은 지금 누리겠다는 쪽에

기운다.

아이러니하지만

진심이다.


미래를 준비하는 행위 자체가

이미 현재의 보상이라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퇴직 전에 했던 노력들은

지금 나에게

어느 정도의 안정으로 돌아왔지만,

그 시절 자체도 충분히 값졌다.


천 원짜리 커피 앞에서

망설이던 순간들,

불안을 다루는 감각을

최고치로 경험했던 시간들.


불안을 너머

공포에 휩싸인 시절도 있었다.


그 시간 덕분에

세상을 보는 눈도 달라졌고,

나를 이해하는 깊이도 달라졌다.


그전의 나는

아주 어설픈 이상주의자였고,

자본주의를

속물적인 체계쯤으로

단순화해 생각했다.


하지만 역사를 들여다볼수록

자본주의만큼

인간적인 시스템도

없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지금은 돈으로 싸우지만,

이전에는 목숨을 내놓고 싸웠다.

적의 목을 베고,

신의 이름으로 살육을 정당화하던

시대가

그리 먼 과거도 아니다.


덜 죽이게 된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종교든, 점이든, 명리든

그 자체를 믿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걸 필요로 했던 인간의 상태가

더 선명하게 보인다.


삶이 그만큼

쓸쓸하고,

예측 불가능하고,

폭력적이었기 때문에

이야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문학이 다시 등장한다.


설명을 강요하지 않고,

해답을 주지 않으면서도

그 상태를

그대로 견디게 해주는 언어.


누군가를 구원하겠다고

말하지 않으면서도,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을

조용히 남겨두는 문장들.


나는 요즘

퇴직 이후의 시간을

그런 문장들과 함께 보낸다.


그 과정에서

리처드 도킨슨에게

독설을 뿜었던 테리 이글턴이 떠오르기도 하고,

알랭 드 보통의 문장에서 온기를 느끼기도 한다,

그러다 어느새

켄트 하루프까지

도착해 있다.


문학이 삶에

어떻게 내 삶에 스며드는지

지켜보고 있다.


퇴직자의 느린 하루 속에서,

설명되지 않는 감정과 생각 사이로,

문학은 그렇게

말없이 들어온다.


어쩌면 나는

운명을 알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운명이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고 싶은 사람인지도 모른다.


확실한 답이 주어지는 순간,

질문은 닫힌다.

사주가 말해주고,

별이 정해주고,

카드가 방향을 지시하면

삶은 잠시 편해질 수는 있어도

더 이상 사유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종교가 없으면서도

계속 들여다본다.

신뢰하지 않으면서도

왜 필요한지 이해하려 한다.


퇴직 이후의 시간은

이런 질문을 피하지 않아도 되는

드문 시기다.


출근하지 않아도 되고,

누군가의 판단을

즉각 반영하지 않아도 되고,

생각의 속도를

일정에 맞출 필요도 없다.


하루가 길게 느껴질 때,

나는 그 길이를

없애려 하지 않는다.


대신 그 안에

무엇이 떠오르는지를 본다.


불안,

허무,

가벼운 기쁨,

이유 없는 평온.


그 사이에서

책 한 권이

갑자기 말을 걸기도 한다.


무엇을 읽어야겠다고

정하지 않는다.

어떤 질문 옆에

어떤 문장이 놓일 수 있을지를

지켜볼 뿐이다.


그래서 필사를 한다.


잘 쓰고 싶어서가 아니라,

생각의 속도를

손의 속도로

낮추기 위해서.


한 문장을 옮겨 적다 보면

이 문장이

나에게 필요한 이유가

뒤늦게 드러난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간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아무 성과도 없고,

누군가에게

설명할 일도 없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비어 있지 않다.


운명을 묻지 않았고,

답을 받지도 않았지만,

하루를 통과했다는 감각만은

분명히 남아 있다.


아마도

지금의 나는

그 정도면 충분한 상태에

와 있는지도 모른다.


문학은

그 사실을

확인시켜 주지도 않고,

부정하지도 않는다.

함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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