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L289. 퇴직자의 책상

시간의 소유권자

by Mira



오후 5시


회사에 있었으면

눈이 빠질 듯한 피로가 몰려오고,

퇴근 시간만 간절히 기다리던 시간대다.


몸은 의자에 붙어 있지만

마음은 이미 자리를 떠 있었던 시각.


그 시간의 피로는

일을 해서가 아니라

시간에 붙잡혀 있다는 감각에서 왔다.


같은 시간, 나는 책상에 앉아 있다


퇴직을 했는데도

나는 여전히 오전부터 책상에 앉아 있다.


재즈 연주를 틀어두고

글을 쓰고

이미지를 떠올린다.


사실 이건 회사에서도 하던 일이었다.

달라진 건 행동이 아니라 공기다.

끝나야 풀리는 시간이 아니라

머물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는 것.


피로의 성질


예전의 피로는

탈출을 전제로 한 피로였다.

이걸 끝내면 풀릴 수 있다는

조건부의 피로.


지금의 피로는 다르다.

오래 머물 수 있어서 생기는

자발적인 사용감에 가깝다.


피로의 성질이 바뀌면

시간을 대하는 태도도 바뀐다.


그리고 나는

이런 근로 후의 피로감을

좋아한다.


퇴직해도 일은 계속


퇴직하면 쉬어야 한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나는 쉬는 사람보다

생각하는 사람에 가깝다.


공부하는 상태,

아이디어를 쥐어짜는 상태,

생각이 작동하는 그 지점에서

나는 가장 안정적이다.


아무 목적 없이

머리를 쓰고 있을 때

나는 가장 나다워진다.


결과로 증명하지 않아도


이 책상에서는

성과를 증명할 필요가 없다.

쓸모를 설명할 이유도 없다.

누군가에게 이해시키지 않아도 된다.


회사 책상에서는

항상 증명이 먼저였고,

이 책상에서는

사고가 먼저다.


되돌아가지 않겠다는 의지


불안은 여전히 있다.

투자를 안 해도 불안했고,

투자를 하며

공포와 함께 사는 법을 배웠다.


하지만 가장 두려운 건

내가 뭘 모르는지도 모른 채

사는 일이었다.


지금의 불안은

증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이 방향을 선택했을 때

동반되는 감각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불안을 통과하되

되돌아가지는 않기로 했다.


퇴직자의 책상


나는 쉬기 위해

퇴직한 게 아니다.


시간의 소유권을 되찾기 위해

퇴직했다.


이 책상은

직업이 아니라

내 생존 방식이다.


퇴직자의 책상에는

꼭 해야 할 일은 없지만,

생각은

계속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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