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는 못 끊지
퇴직자는 지위가 없다.
명함도, 직함도, 소속감도 없다.
그래서 가끔 무방비 상태가 된 것 같은
불안이 찾아온다.
현대 사회에서
개인이 성취한 지위는 곧 존재의 가치로 번역된다.
어디에 다니는가,
무엇을 이루었는가,
얼마나 버는가.
이 질문들은 결국 이렇게 묻는다.
당신은 얼마나 가치 있는 인간인가.
이 속도전에서 뒤처지면 무엇이 박탈될까.
돈일까, 기회일까.
아니면 존중일까.
머스크의 어드바이스
일론 머스크는 넷플릭스를 끊고
그 시간에 논문 한 편이라도 더 보라고 말한다.
AI 시대에 낙오자가 되지 않으려면
계속 배우고,
계속 준비해야 한다고 한다.
문명이 발전하면
인간은 조금쯤 쉴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현실은 다르다.
이제는 문명의 속도까지
따라잡아야 살아남는다고 말한다.
정말 그럴까.
기차가 등장했을 때
인간은 기차보다 빨라지려 하지 않았다.
대신 기차를 타는 법을 배웠다.
지금은 어떤가.
AI가 인간보다 빠르게 읽고 계산한다고 해서
인간이 열등해지는 걸까.
스위밍 풀
수영을 시작한 첫 주에는
물속에서 20분만 허둥대도
밖으로 나오자마자 실신하듯이 뻗어버렸다.
다리는 후들거리고
눈꺼풀에 잠이 쏟아졌다.
며칠을 반복하자
5분 정도는 더 물속에 머물 수 있게 되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몸은 느낀다.
하지만 뇌는 계산을 시작한다.
30분은 채워야 하지 않나.
조금 더 버틸 수 있지 않나.
이 정도로는 아깝지 않나.
몸은 만족을 말하고
뇌는 효율을 말한다.
현대 사회는
몸의 감각보다 뇌의 계산을 더 신뢰하도록 훈련해 온 건 아닐까.
조금 더.
조금만 더.
이왕이면 최대치.
그 계산 속에서
‘충분하다’는 감각은 쉽게 밀려난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속도를 선택하는 것.
몸이 “오늘은 여기까지”라고 말할 때
그 신호를 존중하는 것.
그것은 게으름이 아니라
기준을 바꾸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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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 이후
나는 얼마나 더 잘할 수 있는지를 묻기보다
얼마나 나로 살 수 있을지를 묻는다.
뒤처지는 것이 두려운 건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존엄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나는 문명의 속도를 이길 수는 없다.
하지만 내 속도를 선택할 수는 있다.
하루 30분의 수영
아직은 그걸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