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만드는 역량 부족
회사원에게는
시스템이 주는 안정감이 있다.
동시에
내가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혼란도 있다.
퇴직자에게도
비슷한 감정이 있다.
해방감.
그리고
그 자유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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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내가
무슨 일을 제일 많이 했을까?
스스로 생각해 보니
디자인도 아니고
아이디어 개발도 아니었다.
가장 많은 에너지를 쓰는 일은
눈치 보기였다.
결정권자의 눈치를 보고
동료들의 눈치를 보게 된다.
내 디자인이
결정권자의 눈에 차는지.
내가 하는 말이
동료들의 심기를
거스르지는 않는지.
조직생활이란
적당히 눈치를 챙겨야
큰 마찰이 없는 법이니까.
서로에게
예의를 지키기 위한 눈치라면
괜찮다.
그러나 어떤 날에는
허공을 향해
오답노트를 찾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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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장이 바뀐다.
그의 취향과 눈높이에 맞는
보고서를 다시 장식한다.
나는 이것을
금칠한다고 표현했다.
내용은 그대로인데
더 있어 보이게 만드는 것.
그것도
회사원의 중요한 역량이다.
어느 날
영혼을 갈아 넣어 작성한 보고서를
조직장에게 올렸다.
한동안 말이 없던 그가
인쇄된 종이를 보더니 말했다.
번진 잉크가 만든 점을
가리키며
이건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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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방향을 설명하는 말을
집중해서 듣다 보면
어떤 순간이 온다.
그래서
뭘 수정하라는 거지?
한국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이다.
회의에 들어갔던
사람들끼리
다시 모여 회의를 한다.
그래서
뭘 수정하라는 거야?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알게 된다.
서로가 원하는 방향을 말하고 있을 뿐
정작
그분이 원하는 게 뭔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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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화장실에는
항상 대표님의 디렉션이 붙어 있었다.
변기에 앉았을 때
눈높이에 딱 맞는 자리에.
고객만을 생각해라.
그 외의 헛짓거리는 하지 마라.
하지만
우리는
20대 핵심 고객의 라이프스타일을
생각할 틈이 없었다.
대신
40~50대 아저씨의 취향을
맞추느라 바빴다.
리테일 회사의 주요 고객은
여성이다.
브랜드에 따라
20대에서 50대까지
다양한 고객이 있다.
왜
의사결정권자는
그들의 라이프와 가장 거리가 먼
항상 아저씨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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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
나는 이런 생각으로
자신을 힐난한다.
왜
나는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만들지 못하는가.
자괴감이 밀려온다.
시장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조직문화.
뫼비우스 띠 같은 의사결정의 늪.
회사도 이상하다.
리더들도 이상하다.
조직원들도 역량이 없다.
각자의 입장에서
각자의 이야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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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가장 잠 못 들게 했던 것은
결국 이 질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회사가 아니면
먹고살 일이 막막하다는
현실.
그때가
가장 비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