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L317. 회사원의 회사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만드는 역량 부족

byMira



회사원에게는

시스템이 주는 안정감이 있다.


동시에

내가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혼란도 있다.


퇴직자에게도

비슷한 감정이 있다.


해방감.


그리고

그 자유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혼란.



회사에서

내가

무슨 일을 제일 많이 했을까?


스스로 생각해 보니

디자인도 아니고

아이디어 개발도 아니었다.


가장 많은 에너지를 쓰는 일은

눈치 보기였다.


결정권자의 눈치를 보고

동료들의 눈치를 보게 된다.


내 디자인이

결정권자의 눈에 차는지.


내가 하는 말이

동료들의 심기를

거스르지는 않는지.


조직생활이란

적당히 눈치를 챙겨야

큰 마찰이 없는 법이니까.


서로에게

예의를 지키기 위한 눈치라면

괜찮다.


그러나 어떤 날에는

허공을 향해

오답노트를 찾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조직장이 바뀐다.


그의 취향과 눈높이에 맞는

보고서를 다시 장식한다.


나는 이것을

금칠한다고 표현했다.


내용은 그대로인데

더 있어 보이게 만드는 것.


그것도

회사원의 중요한 역량이다.


어느 날

영혼을 갈아 넣어 작성한 보고서를

조직장에게 올렸다.


한동안 말이 없던 그가

인쇄된 종이를 보더니 말했다.


번진 잉크가 만든 점을

가리키며


이건 뭐지?



수정 방향을 설명하는 말을

집중해서 듣다 보면

어떤 순간이 온다.


그래서

뭘 수정하라는 거지?


한국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이다.


회의에 들어갔던

사람들끼리

다시 모여 회의를 한다.


그래서

뭘 수정하라는 거야?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알게 된다.


서로가 원하는 방향을 말하고 있을 뿐

정작

그분이 원하는 게 뭔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을.



회사 화장실에는

항상 대표님의 디렉션이 붙어 있었다.


변기에 앉았을 때

눈높이에 딱 맞는 자리에.


고객만을 생각해라.

그 외의 헛짓거리는 하지 마라.


하지만

우리는

20대 핵심 고객의 라이프스타일을

생각할 틈이 없었다.


대신

40~50대 아저씨의 취향을

맞추느라 바빴다.


리테일 회사의 주요 고객은

여성이다.


브랜드에 따라

20대에서 50대까지

다양한 고객이 있다.


의사결정권자는

그들의 라이프와 가장 거리가 먼

항상 아저씨들일까?



어느 순간

나는 이런 생각으로

자신을 힐난한다.


나는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만들지 못하는가.


자괴감이 밀려온다.


시장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조직문화.

뫼비우스 띠 같은 의사결정의 늪.


회사도 이상하다.

리더들도 이상하다.

조직원들도 역량이 없다.


각자의 입장에서

각자의 이야기만 한다.



나를 가장 잠 못 들게 했던 것은

결국 이 질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회사가 아니면

먹고살 일이 막막하다는

현실.


그때가

가장 비루했다.

작가의 이전글[LIFE] L316. 30년을 생각하면서 하루를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