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 ④ 민채의 이야기
오빠, 안녕하세요.
한 스무걸음이나 될까한 앞에 해인오빠가 혼자 걸어가는 뒷모습이 보인다.
큰 키에 어깨가 넓고 머리도 바싹 짧게 자른 뒷모습에 어울리지 않게 가방에는 핑크 병아리 키링을 달랑 달랑 달고 다녀서 한 번에 알아볼 수 있는 저 사람은 해인이 오빠다.
왠일이지? 항상 친구들 두셋과 같이 다니더니 오늘은 혼자 걸어가네
말 한 번 제대로 못 걸어봤는데 오늘은 진짜로 내 이름을 확실히 가르쳐줘야지 하며
슝 하고 앞질러 달려가 인사를 했다.
"오빠, 안녕하세요 ^^ 25기 송민채입니다."
"여~ 새내기? 근데 내 여동생은 집에 있는데? 난 학교에서 여동생 안키워, 그냥 형이라고 해."
"엄마야, 요즘 누가 남자선배한테 형이라고 해요. 우리 동기들 오빠 동기들한테 맨날 오빠라고 불러요~"
"엥? 누구한테?"
"다들 그러던걸요, 오빠. 동방 가시는 길이세요? 오늘 저녁 토론회 있던데 주제가 뭐래요? 오빠는 오실거예요?"
"야, 야.. 팔에 붙은 털들 싹 다 일어난 거 보여? 나 니 오빠 아니다?."
그 적응 못하겠다는 '오빠' 소리에 무뎌지게 하려고 내가 얼마나 해인오빠를 불러댔던가.
해인오빠가 유명한 CC인건 나도 알고 있다.
오래된 커플이라 그런가 둘이 캠퍼스를 손 잡고 걷고 있는 걸 보면 연인이 데이트 하는 모습이라기 보다는
부부가 밥 잔뜩 먹고 동네 마실 다니는 거 보는 기분?
일단 지금까지 지온언니가 치마나, 블라우스, 머리띠, 귀고리, 목걸이, 구두 머 여성스럽고 멋스럽게 하고
다니느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몸에 있는 장신구라곤 엄지에 들어가있는 은반지 정도?
커플링을 왜 엄지에?
심지어 둘이 노는 것 자체가 엽기다.
깔깔거리고 등 때리며 아무렇지도 않게 걷다가 화장실을 지나갈 때 갑자기 지온언니가 해인오빠를
여자화장실쪽으로 퍽 밀고 달아난다.
여자화장실에 강제로 밀려들어갔다 후닥딱 튀어나온 해인이오빠는 이미 도망가고 있는 지온언니
목덜미를 와락 잡아 헤드락을 걸어버린다.
어쭈? 전에 니가 나 남자화장실에 쳐 넣은 건 기억 안나?
하면서 오빠 손을 비틀어 꼬더니 자기 어깨에 올려 놓는다.
오빠는 자연스레 어깨에서 손을 내려 지온언니 손을 잡고 걷는다.
뒤에서 걸어가며 전말을 본 나는 황당하다.
흠.. 저게.. 연애 맞아?
나는 해인오빠 앞에선 먼저 말 한 번 걸어 볼라 치면 500번은 속으로 연습한 뒤여야 하고
지나가는 말로 들은 하얀색을 좋아한다는 그의 말에 흰티 든 흰 운동화든 하얀색 아이템 하나 없이는 학교에 간 적인 없고
동방 들어가기 전엔 화장실에서 얼굴 한 번 더 확인하고
좋은 향수 뿌리고 학교 다니는데 말이다.
지온언니는 무슨 노력을 했다고 해인오빠를 지배하다시피 하는 것일까.
날로 먹는 것 같아 심기가 불편하다.
얼씨구? 이번엔 벚꽃 따서 또 서로 먼저 귀에 꽂으라고 옥신대네?
아이구? 해인이오빠가 목련꽃을 어거지로 언니머리에 꽂고 있네?
"야, 이쁘고 어린 애들한테나 잘 어울리지, 날 왜 줘?"
소리에 둘이 동시에 뒤에 있는 나를 본다.
갸우뚱?
"오~ 귀여운 새내기, 민채야 이 꽃 줄까? 탐스럽지?"
"네? 네에에에..."
당황스럽다. 오늘 아침 한 시간을 세팅한 완벽한 내 머리인데.
머리 헝클어지는 거 너무 싫어서 안할래요 소리를 하기도 전에 성큼 가까워진 해인오빠가 한 손으로
내 턱을 살짝 잡곤 남은 한 손으론 귀 뒤로 꽃 가지를 꽂아주는 잠깐의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나도 모르게 숨이 참아졌다.
여친 있는 나이 많은 복학생에게 나 같은 킹카가 이럴 일이냐고...
그 날 이 후 나의 눈은 해인오빠가 눈에 들어올 때까지 자주 두리번 거리게 되었다.
그렇게 찾아낸 해인오빠의 눈이 온통 지온언니에게 고정되어 있는 걸 보면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려 버리곤 한지가 벌써 오래다.
그런데 요즘은 지온언니에게 시선이 꽂혀 있는 녀석이 한 명 더 있다.
민혁이다.
이건 아닌것 같다.
부아가 스물 스물 치밀어 오른다.
원래 사귀다 헤어지면
얼굴도 보지 말아야 하는 거 아닌가?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어야 하는 거 아니냐구
머지?
왜 아직도 저렇게 서로 눈을 마주치며 웃을 수가 있느냐고
'정상이 아니지 않아?' 라고
속마음이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 한 걸 정신차리고 꾹 삼켰다.
"해인오빠 지온언니랑 헤어졌다고 하더라?"
소리에 소민이 어깨를 때려가며 왠일이니, 왠일이니를 연발하고 호들갑을 떨었던 그 날로부터
벌써 한달이 지났다.
해인오빠는 여전히 재미있고 친절하다.
하지만 한달 전 처럼 그 친절함은 지온언니를 제외한 모두에게 철저히 같은 질량의 것이다.
나에겐 그런 친절함이 오히려 뚫을 수 없는 철벽으로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이도 새벽에 나와 도서관에 자리를 맡아 두고 거의 억지로 해인오빠에게 넘겨주었다.
점심을 사달라기 딱 좋은 핑계거리를 오늘도 만들어내고야 말았다.
항상 사람들 사이에 둘러쌓여 사는 해인오빠인지라,
구내식당에서 철식판에 덜그럭 소리를 감추지 못하고 15분만에 뚝딱 헤치우는 멋없는 점심인데도 단 둘이서 먹는 것이라 내가 특별한 사람이 되어 있는 것 같다.
"오늘 국문과애들 일일찻집 한다고 해서 티켓 사 놓은 거 있는데, 후식 제가 쏠께요."
"오!! 공짜 커피? 좋지, 근데 나 1시부터 밤까지 풀로 수업이라 원샷 드링크 하고 바로 수업가야 한다~"
"저도 이거 오늘까지 써야 하는데 레포트 때문에 지금 후딱 써버리려던 차여서 너무 좋아요."
무슨 상관이랴, 일일찻집 장소까지 가려면 후문으로 나가야 하고
후문까지는 10분도 더 걸어야 하는데, 그것도 둘이서만 걷는데 ..
공대까지 데려다줄 핑계야 지금부터라도 무궁무진하게 만들어내기에 충분한 시간인걸
"그럼 제가 커피 쏴드리죠 ^^ 가요"
후문을 향해 조금 빠른 걸음으로 오빠 옆을 겉는 나의 발은 마냥 가볍고 들이마시는 공기는 달디 달다.
나란히 걸을 때 오빠의 어깨 높이에 걸린 내 눈에 보이는 그의 턱선과 옆모습이 참 근사하다.
콩깍지지 머.
그런데 저게 머야, 수진이언니를 비롯한 몇 몇 동아리 친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제발 모른척 그냥 지나가라 제발..
"수진쓰~~ 밥 먹었냐? 어디가?" 손을 번쩍 들고 해인오빠가 먼저 아는 척을 한다.
그냥 지나칠리가 없지 그럼. ㅠㅠ
"안녕하세요~"
"어, 그래, 안녕, 민채야~ 넌 어디 가냐? 지금 수업있지 않아? 난 이게 첫수업이라 지금 오는 길이야."
"그래? 그럼 지온이 밥은?"
"지온이 밥을 왜 나한테 찾아? 안그래도 지온이가 전화하긴 했는데 알아서 먹고 있겠지 머."
"그래?"
아니 지온이언니 밥이 왜 궁금하냐구요, 헤어지셨다메요오..
얼씨구 전화는 또 왜 해요..
"여~~ 어디냐?, 밥 먹었냐? 그래? 나도 아직인데, 나 배고파 죽을 거 같아. 지금 시간이 몇 신데 다들 먹었지. 너는? 그러니까 어디냐고? 일단 학관쪽으로 걸어 와봐."
아니, 이보세요...
"밥을 또 드시게요?" 최대한 눈을 똥그랗게 뜨고 항의하는 듯이 볼멘 소리를 내 보았다.
"어, 나 아직 덜 불렀어"
"지금 찻집 가는길이었는데요?"
"야, 너네들 오늘 국문과 일일찻집 있는 거 알았어? 동기들이 좋은 일 하는데 가서 응원해줘야지~~
민채도 지금 가는 길이라니까 같이 가서 후식먹어라~~"
순간 .. 때려주고 싶었다.
"머래요? 안 가게요?"
"먹은걸로 할께~ 잘 먹었다~~, 내 것까지 너가 두 잔 마셔~~ 좋겠네~~"
"수업이라면서요?"
"야! 너 이 수업 나랑 같이 듣지 않냐? 안 들어가?" 수진언니가 한 마디 보태주었다. "
"날도 좋은데 째지 머~, 승우 있으면 대출 좀 해달라고 해~ 안되면 말고~"
하고 오르막길 위에 있는 도서관을 향해 몸을 돌려 빠르게 걸음을 옮긴다.
"민채!! 일일찻집 어디서 하는데? 팥빙수도 있었음 좋겠다. 티켓 몇 장 있어?"
내 속과 다르게 우리 동기들은 즐거운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