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각 - ⑤ 수진이의 이야기
어?
전주에서 입시학원다닐 때 봤던 남자애가 같은 과에 있다.
왁자지껄 많은 친구들과 무리지어 다니는 중에 키가 커서 안 보일래야 안 보일 수가 없었던 그 애다.
전주에서 상경하자마자 자취 준비로 정신 없어 OT도 못가서
이미 서로 돈독해져 있는 동기들 사이에서 혹시 사투리 걸릴까봐 먼저 말도 못 붙이고
소주잔을 보고 있자니 점점 주눅만 들어가던 중에
특유의 굵고 낮은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목소리쪽으로 고개를 빠르게 돌리니 그 애다.
박해인.
이제 개강한 지 일주일도 안 지났는데, 벌써 그를 중심으로 친한 무리가 생겼나보다.
어색하고 긴장됐던 자리가 익숙한 전주 사거리 맥도널드에 앉아있는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졌다.
같이 앉은 동기들 소개를 듣고 내 소개도 하며 새우깡에 소주를 홀짝이면서도 내 귀는 해인이의 목소리가
중간 중간 확인될때마나 안심을 했다.
1차가 끝나고 나오니 처음 먹어본 쓴 소주이기도 했고, 긴장이 풀려서이기도 하고 몸에 힘이 좀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빨리 안전한 집에 가고 싶건만 여자라곤 나까지 다섯명밖에 없는 과라서 그런가 선배들은 2차에 꼭 같이 가야 한다며 가방을 끌어당겼다.
내 발은 집이 있는 교문을 향해 있는데 몸은 2차 고갈비 집을 향해 비틀려 당겨지고 있으니 취기와 곤란함에 얼굴만 더 더 발게졌다.
"야, 그럼 아이스크림 하나 사줄께, 술 좀 깨고 고갈비집 가자, 따라와."
라며 내 가방을 쥐고 놓지 않는 선배 손을 공중으로 던져버린 큰 손이 편의점으로 나를 쑥 밀어 넣었다.
해인이였다.
편의점 아이스크림 통을 굼뜨게 뒤적이던 해인이는 웅성 웅성 무리들이 사라지고 나서야 쌍쌍바 하나를 내 코앞에서 흔들었다.
"먹을래?"
"싫어, 난 붕어빵."
"너 전주에서 왔다며? 나 본 적 없냐? 넌 기숙사 됐어? 난 떨어져서 하숙하는데"
이런 게 취한다는 건가, 뭐라 뭐라 물어보는 해인이의 낮은 목소리가 느릿 느릿 늘어지게 들리는 테이프 소리같긴 한데 멈추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을 하며 천천히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삐삐삐삐
해인이와 내 삐삐가 동시에 울린다.
둘다 '8282'가 찍힌 걸 보니 2차 빨리 오라는 소리인가보다.
"야, 빨리 들어가라, 너 길거리에서 토하다 집 갔다고 말해 놓을께~."
그러곤 편의점 문을 박차고 빠르게도 달려간다.
그 날이후 우린 맘 잘 맞는 친구로 잘도 붙어 다녔다.
강의표도 같이 짜고 레포트 팀도 같이 하고 심지어 동아리까지도 같은 곳으로 들어갔다.
해인이가 있으면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을 새로 만나는 자리도 불편하지 않고 즐거웠다.
그렇게 친한 친구나 선배도 늘어가고 바빠질수록 엄마와 고향 친구들이 그리워서 코 끝 찡하곤 했던 시간이 점차 사라져갔다.
나는 20살의 3월에 잘 적응하게 되었다.
동아리에서 첫 MT를 가기로 한 날,
나와 해인이는 미리 민박집에 가서 짐 정리도 하고 장도 봐 둘 선발대를 자청했다.
엠프, 기타, 현수막 등 바리 바리 무거운 짐을 들고 전철 타고 청량리까지 가서 또 강촌 가는 기차를 기다리는 것도 마냥 신이 나 있었다.
맑은 날 철컹 철컹 철커덕 경쾌하고 리드미컬한 기찻소리를 들으며 해인이와 시시콜콜 얘기하는 시간이 참 즐거웠기 때문이다.
우린 민박집에 도착해 행사 준비, 저녁 준비 등으로 분주히 일했고 겨우 허리 펴고 쉴 즈음에 후발대가 도착했다. 시끌시끌 다가오는 후발대 중에는 처음 보는 여자아이들도 있었다.
어? 내가 모르는 동기들도 있었던가? 싶었다.
"왔냐? 가방만 내려놓으면 되게 완벽히 준비해놨다~, 잘했지? 역시 나밖에 없지~?."
해인이가 그 여자애들에게로 재빠르게 달려 내려가 가방을 받아든다.
"누구야? 난 처음 보는데?"
"지난 주에 들어왔다나봐, 사학과애들이라는데 한꺼번에 6명이 들어와서 형들이 엄청 이뻐하잖아.
동방에 앉아있을 시간이 없어, 형들이 밥 사줘 커피 사줘 맨날 데리고 나가더라고."
"너도 봤어? 해인이는 친한가봐?"
"전에 회장 테이크에서 생일모임했을 때 해인이도 갔던 모양이더라고, 그 때 첨 봤다던데?"
"안녕 ^^ 나도 21기, 사학과 설지온이야. 너가 수진이지? 얘기는 많이 들었는데 오늘 처음 보네 ^^."
"어, 난 이수진. 컴공과야. 내 얘길 누가 왜 하디?"
"크, 듣던대로 엉뚱하고 재밌네 ~~"
동그란 눈에 목소리는 굉장한 솔톤이고 명랑 그 자체다.
"오~ 승우~ 고생했어?, 형! 안녕하세요.. 저희 오는데 엄청 고생했어요, 오늘 저녁 진짜 많이 먹을거예요..
지형이형 오늘 모닥불 하는 거죠? 저 완전 밤 샐거예요.. 감자도 구울거죠? 꺅~~ 강 너무 예쁘다. 여기 왜 이렇게 좋아요? 성미야 너 어제 술 많이 먹었어? 완전 상태 안 좋은데?"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끊임없이 사람들한테 말을 붙이고 조잘댈 수 있나 속으로 생각했다.
사학과 다른 친구들도 나를 매우 반가워하며 인사했다.
짐을 풀고 게임도 하고 족구도 하는 동안 이상하게 해인이의 목소리가 내 주위에서 들리질 않는다.
뭐 나도 그간 친구도 많아져서 그가 내 주위에 없다해서 불안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근처로 자전거 하이킹을 가기로 한 일정을 위해 민박집을 우르르 나왔다.
2인용 자전거는 태어나서 처음 봤다.
그 넓은 캠퍼스를 자전거로 활보하고 다니는 나지만 2인용은 어떨지 궁금해졌다.
해인이더러 열심히 굴리라고 하고 나는 뒤에서 좀 쉬어볼까? 생각으로 해인이를 찾는데 벌써 저 앞에서
지온이를 붙잡고 뒷좌석에 태우고 있다.
물음표?
동작 한번 빠르네 ...
갑자기 맨날 타는 자전거를 굳이 강촌에서까지 탈 필요 없지 싶은 맘이 들어 도로 숙소로 들어오고 말았다.
"야, 너 왜 그렇게 무겁냐? 페달은 밟은 거 맞아?"
"웃기지마, 너가 방향 잘못 틀어서 산 밑으로 구를 뻔했어, 뒤에 있는 내가 무거워서 안 떨어진 줄이나 알아, 니 목숨 내가 건졌다? 평생 밥 쏴!"
해가 지기 전에 주거니 받거니 티격거리며 해인이와 지온이가 들어왔다.
"어?! 수진이, 너 자전거 벌써 왔어? 맨 앞이였냐? 보이지도 않더라? 야, 얘 자전거 진짜 겁나 못타더라, 좀 가르쳐라"
"다리 아플까봐 그냥 쉬었어."
"니 튼튼한 다리를 너무 과소평가하지 마라~, 내일 한 번 타봐 경치가 좋으니까 느낌이 또 달라~"
"재밌냐?"
"재밌던데?, 부회장님~ 이제 이거 상추 씻으면 되요? 나 간다~"
(상추 내가 다 씻어놨다 이놈아...) 속으로만 읊었다.
그리고 또 한마디 속으로 읊었다. (서운하다, 이놈아...)
MT 지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학관에서 식당 줄을 서 있는데 저쪽에 건축과 애들이 두런 두런 하는 중에 귀에 우리 동아리 이름이 들어왔다.
"사학과랑 미팅? 그 과에 동아리에서 벌써 CC 된 애 있다던데? 그 이쁘장하게 생긴애랑 키 큰 애 사귄다더만.."
키 큰 애? 우리 동아리에? 누구지? 설마?
설마가 아닌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저기 학관 현관밖으로 빠른 걸음으로 나가고 있는 키 큰 남자애의 뒷모습은 분명 해인이다.
해인이는 자기를 쏘아보고 있는 지온이의 손을 덥썩 잡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팔불출인가?
갑자기 입맛이 뚝 떨어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