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 ② 지온이의 이야기
"야. 너 어제 생일인데 해인이가 자라 안 사줬다고 삐졌다메? 애냐? 자라 안 사줬다고 화를 내게?"
"엥? 아니야! 자라 안 사줘서 그런게 아니라... 생일인데 맨날 신경 안써주니까 그런거지!"
또 이런식이다. 우리 둘의 이야기는 동기들이 이미 알고 있다.
1학년부터 CC였던 우리는 단 둘이 데이트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항상 학교 근처에서 동기들과 함께였다.
생일도 크리스마스도 연말도 여름휴가까지도 둘만의 시간은 잘 없었다.
종로에서 영화 한 편 봤던 게 다군.
어제도 해인이와 함께한 다섯번째 생일이었다.
그래도 첫 해, 두 해 때는 선물도 챙기고 카드도 쓰고 하더니 이젠 아예 당연히 동기모임이 되어서
늦게까지 술 먹고 어젠 물에 빠진 바람에 집에도 혼자 갔다.
장난삼아 나 자라 키워 보고 싶은데~생일 선물로 해 줘 ^^
라고 농담삼아 말한 적이 있는데, 어제는 민혁이가 500원 넣고 뽑은 작은 곰돌이인형보다도 더 작은 선물 하나 못 받았다.
나한테 신경 좀 써주지 하는 생각에 볼 멘 소릴 한 번 해봤는데
그게 어떻게 자라 안 사줬다고 삐졌다는 말이 되어 친구들의 놀림감이 되어버렸다.
마음이 불편하다. 나도 모르게 입이 삐죽해진다.
해인이는 또 장난만 친다.
"야, 자라는 어따 갖다 쓸라고 아직도 삐졌어?, 키워서 잡아먹을라고 그러지? 내가 오늘 밥 살께 밥 먹으러 가자"
"아, 됐어."하고 팔뚝을 잡아끄는 그 녀석을 뿌리치는데 저 쪽에서 귀여운 후배들이 다가온다.
"해인오빠~ 안녕하세요. 수업 끝나셨어요?"
"하이~수업 끝났냐?"
"네, 끝났어요, 오빠 우리 오늘 팥빙수 먹고 싶은데.."
"그래? 밥 먹으러 가려고 했는데 같이 가자. 후식은 내가 쏘지"
"앗싸"
원래 동생들의 '오빠' 소리를 좋아하는 건 알지만 오늘따라 저것도 거슬린다.
나랑 둘이 먹자고 해놓곤..
"난 빼줘. 밥 생각 없다."
"엥? 같이 가야지, 너 배 고프면 성질 더러워지잖아"
"이따 수진이랑 대충 떼울께, 잘가라~"
하고 휙 돌아섰지만 머 따로 갈 데도 없다.
4층 동방으로 아직 삐죽한 입을 내밀고 발걸음을 옮겼다.
후배들이 또 우르르 계단을 타고 내려온다.
"안녕하세요. 식사하셨어요?"
"응, 먹었어. 먹고들 와"
다행이다. 차라리 동방에 아무도 없으면 열도 받는데 기타나 혼자 실컷 두드려야겠다.
갑자기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난 이렇게 단순해서 큰 일이다.
화가 오래가질 않으니까.
아무도 없을거라 생각했는데 귀여운 민혁이가 앉아있다.
"어? 왜 혼자 있어? 아까 다들 내려가더만"
그런데 얘 얼굴이 왜 이렇게 하얗지?
만날 얼굴에 웃음이 한가득해서 인사하더니 오늘은 영 다운모드네.
"어제 물에 빠져서 못 들어갔다더니 감기걸렸어? 얼굴이 안 좋네? 어디서 잤는데?"
"선배"
"어, 왜?"
"왜 남친 있으시다는 말씀 안하셨어요?"
"엥?"
"해이이형이랑 CC라면서요?"
머냐. 이건 좀 항의하는 것 같다?
"어, 그거 모르는 사람도 있었어? 다들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머지? 얘 눈빛에 왜 원망이 한 가득 담겨있는거냐?
우리 둘이 CC인거야 워낙 오래된 커플이고 민혁이 동기들도 다들 알고 있어서 따로 떠벌리고 다닐 일도 없었는데 얘는 좀 늦게 알았나보다. 그게 그렇게 억울한가..
"머야아.. 머가 불만이야? 내가 너무 아깝냐?"
"아니예요.. 저 가보겠습니다"
내가 거짓말한것도 아니고 괜히 기분이 그렇네. 오늘 머가 이러냐.
아씨. 다음 수업만 받고 집에 일찍 가야겠다.
오늘도 민혁이가 메일을 보냈을려나?
이 녀석 참 귀엽다.
메일 나에게 메일을 보낸다.
별 내용도 없다 ..
오늘 날씨라든지 명언에 덧붙여 자기 일상을 두런 두런 적어 보낸다.
- 오늘은요 노래방에 갔는데 술을 먹어서 그런지 노래가 잘 나오더라고요.
- 오늘은요 술을 너무 먹고 집에 안들어가서 엄마한테 쫓겨날 뻔 했습니다.
가벼운 안부인사에 불과하지만 이메일 편지함에 꼬박 꼬박 들어오는 새편지에 재미 붙인 지가
벌써 한 달이 넘어간다.
그랬던 메일이 며칠째 없네?
해인이랑 사귄다는 걸 혼자 늦게 안 게 아직도 그렇게 억울한가?
그러고 보니 얼굴도 그 뒤론 못 본 것 같군.
"누나, 오늘 술 좀 사주세요"
지 생각하는 지 어떻게 알았는지 문자가 왔다.
왠 술?
난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게 해인이는 불만이었다.
친구들끼리 술자리에 함께있는거야 좋아하지만 해인이와 단 둘이 술집에 가 본적은 없다.
그래도 뭐 후배가 사달라는데 먹고 싶다면 사줘야지..
별생각 없이 '언제?" 라고 보냈다.
"지금요"
"어딘데?"
"어디세요? 제가 갈게요"
"후문으로 와"
상경대 벤치에 앉아서 다이어리를 끄적이며 시간을 떼우고 있는데 저 멀리서 자켓를 휘날리며 달려오는 민혁이가 보인다.
키도 크고 늘씬해서 그런지 흰색 면티 하나에 자켓 걸쳤는데도 짜식, 자~알 생겼다.
내 앞에서 헥헥거린다.
공대에서부터 달려왔나보다. 꽤 먼거릴텐데..
"야! 오랜만이다. 이 시간에 왠 술? 셤 끝났냐 커피나 사줄께. 아직 해도 안 졌는데 무슨 술이야"
"아뇨, 술 먹어야 해요"
"머야~ 무슨 술? 소주는 내가 싫고 호프사줘?"
호프 한 잔 시켜 놓고 앉았는데 민혁이가 반이나 벌컥거리고 마신다.
"목마르냐?, 안 뺏어 먹는다. 뭐 열받는 일 있었어? 시험 망쳤어? 내가 왠만하면 술 안사는데 너가 이쁘니까 사주는 거다"
맥주 한 컵도 다 비우기 전에 무작정 본론부터 꺼내는 이 녀석의 첫 마디에 깜짝 놀랄 뻔 했다.
"전요, 정말 물리책을 열어도 누나 얼굴이 보이고 영어책을 열어도 누나 얼굴이 떠다녀요.".
난 당황하지도 않았다.
미안하지만 "풋!" 소리가 먼저 났다.
너무 귀여운 거다. 이녀석.. 4살이 어리던가?
나 대학교 처음 들어와서 소주 마시기 시작했을 때 중3이었을거다.
나한텐 그렇게 어리게만 보이는 후배녀석이 맥주 한 컵 다 마시기도 전에 다급히 저 말을 꺼낸다.
저렇게 순수하게 나 좋다는 표현도 처음 들어봤다.
그런데 내가 되받아쳐줄 말은 못 찾았다. 솔직히 너무 귀엽긴 했지만 당황스럽기도 했나보다.
"그래서 시험 망친게 내 탓이다? 으이그.. 임마!"
"아~씨.. 왜 남친이 있으셔가지고.. "
꿍얼거리는 것도 꼭 강아지 같다.
"없으면 머? 어쩔라고? 귀엽긴 한데 이건 아니지? 술은 내가 살 수 있어. 이거 먹고 힘내고 남은 시험 잘 봐라~"
민혁이도 뭐 나랑 어떻게 해볼려고 불러낸 건 아닌것 같았다.
그냥 맘 속에 있는 말을 토해내보고 싶었던 것 뿐이었고, 그 뒤론 그냥 이런 저런 얘기 끝에 호프집을 나왔다.
녀석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보였다.
이젠 실실 웃기까지 한다.
나도 맥주 반컵 정도 같이 마셨더니 얼굴이 닳아오르는 게 느껴진다. 술만 먹음 이렇지 참..
아직 해가 지기 전이라 발간 얼굴로 밖에 나오니 좀 챙피하긴 하다.
후문에서 다시 교내로 들어가는데 해인이가 친구들과 후문으로 나오고 있다.
꼭 저것들은 몰려다니더라..
보통은 교내에서 마주쳐도 '여어~'로 인사하는 해인이가 민혁이와 나를 보더니 순간 표정이 굳는다.
"어?"
"어디가냐?" 라는 나의 질문에
"술 먹었냐?"
"어. 조금"
"알았어"
하더니 휭하고 지나친다.
쟨 또 왜 저래.. 하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