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대학생(21세, 미국 남자)과 친구(를 가장한 이모)가 되었다.
전 세계에 코로나가 퍼지기 시작한 2020년 초.
한국의 방역이 성공적이라며 이른바 'K-방역'으로 해외 언론에도 자주 소개될 정도로 '안전한 국가'로 인식되던 시기가 있었다. 이때 무작정 코로나의 위험을 피해 한국으로 온 미국인 청년이 있었다.
이 청년은 한국에 아는 사람 하나 없지만, 뉴스에서 K-방역 뉴스를 보고 무작정 한국으로 가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리고 검색 끝에 한국 초등학교의 방과 후 원어민 교사에 지원했고, 한 달 만에 합격통보를 받았다고 한다. 보통 한국 초등학교 방과 후 원어민 교사들은 아이들 지도를 위한 다양한 자격증을 보유하고 있다.
하버드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던 이 친구는 영어교사를 꿈꾼 적도 없기에 관련 자격증도 물론 없었지만, 아마도 '하버드'라는 명함 덕분에 쉽게 합격한 게 아닐까 생각된다.
1년간 한국 초등학교의 방과 후 교사로 하루에 3~4시간 정도만 일을 하면 월급뿐 아니라 집까지 제공된다고 하니, 이 친구 입장에선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남는 시간엔 졸업 후 로스쿨에 들어가기 위한 공부까지 할 수 있으니까.
그런 친구와 운이 좋게도 만날 기회가 생겼다. 내가 가끔 취미로 '무료 한국어 수업'을 외국인에게 해주는데 이 친구가 그 post를 보고 연락을 준 것이다.
'코로나를 피해 한국으로 왔는데, 막상 한국어를 못하니 많이 불편해요. 나라에서 지원해 주는 한국어 수업은 한 달 후에나 수강 가능한데 그전에 한국어를 빨리 배우고 싶어요.'
태어나서 처음 봤다. 하버드 대학생.
아직 외출이 무서운 코로나가 한창인 때였던 지라 우리 집으로 초대했다.
외국인들의 최고 선호 메뉴인 불고기를 시작으로 삼겹살, 잡채, 김밥, 오징어볶음, 보쌈...
한국 대표 음식은 거의 다 해준 것 같다. 요리하기 귀찮은 날엔 라면도 먹이고, 짜장면도 시켜주고,
한글도 꾸준히 가르쳐주면서 친분을 쌓아갔다.
21살의 하버드 대학생은 어떤 생각으로 살지, 일반인들과 뭐가 다를지 궁금했는데,
한 가지 확실하게 느낀 건.
'인생의 목표를 부모의 push가 아닌, 스스로 일찍 정했다'는 점이다.
10살 즈음부터, 그냥 본인의 목표는 하버드였다고 한다. 전공은 좀 더 커가면서 결정했다고.
근데 그 친구가 하버드가 제일 훌륭한 학교라고 생각하지만, 한국의 SKY가 입학은 더 힘든 학교 같다고 하는데, 부정도 긍정도 할 수 없었다. 어찌 보면 너무 슬픈 현실이다.
하버드로 목표를 정하곤 그 목표를 향해서 스스로 다양한 노력을 했단다. 그래서 그 노력들 중에 하버드에 갈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가 뭐냐고 묻자 바로 대답한다.
"토론회!"
미국은 학교끼리 토론회를 많이 개최한다고 한다. 짧으면 하루, 길면 2박 3일의 일정으로 열리는 토론회. 다른 학교와의 토론회를 위해서 10시간을 차로 이동한 적도 있다고 한다. 물론 힘들지만 토론회를 정말 좋아했다고 한다. 성과의 좋고 나쁨을 떠나서 그 토론회를 나가기 위해 친구들과 준비하며 함께한 시간들은 하버드 입학뿐 아니라 본인 인생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고 자신했다.
한국의 저명한 학자들을 인터뷰하는 내용 중에는 종종 '학창 시절로 다시 돌아간다면?' 이란 질문이 있다. 그럼 대부분 '실컷 논다', '공부는 안 한다' 등의 대답이 많다. 공부에 파묻힌 본인의 젊은 시절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그런데 이 하버드생 친구는 고교시절을 '공부에 치여서' 지낸 느낌이 아닌, 즐기고 있었다고 하니 많은 생각이 들었다. 딱히 원하는 바가 없이, 그저 수능점수에 맞춰 대학과 전공을 결정했던 내 모습이 부끄럽기도 했다.
물고기를 잡아주는 부모가 아닌, 물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 주는 부모가 되어야 한다는데 사실 나도 내 부모에게 그런 기술을 배운 적이 없으니 막막했다. 그런데 내 나이의 반절에 가까운 21살 하버드 대학생을 만나고 나니 방법이 조금은 보이는 것도 같다. 내 아이들은 본인이 원하는 바를 스스로 결정하고 그를 위해 노력하는 아이로 키울 수 있는 부모가 되어야지 하고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