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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심 Oct 14. 2022

요양원 가던 날.

끝나지 않는 여정.

지난여름의 무더위로 인한 피로를 보상해 주기라도 하는 걸까. 보란 듯이 선선한 바람, 경이로울 만큼 청명한 가을 하늘. 아이들은 신기하리만큼 보채지도 않던 어느 평온한 일요일 오후. 기분 좋게 한 주가 마무리되어 간다는 안도감이 드는 찰나, 전화벨이 울린다.  

ㅡ 엄마

몇 년 전부터 엄마의 전화는 달갑지 않은 소식만을 전한다. 보통 일상의 사소한 일들은 전화가 아닌 메시지로 소통하기에 , 휴대폰 벨소리와 함께 뜬 ‘엄마’라는 두 단어를 보자마자 내 심장 박동수는 높아진다.


“무슨 일이야?”

다급히 전화를 받았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일까 조마조마해하며.

지난 5년간, 뇌졸중을 여러 차례 겪으며 중환자실과 병실을 전전긍긍하던 아빠. 아빠가 퇴원하여 집으로 돌아오면 케어는 온전히 엄마의 몫이었다. 어찌 아빠 탓 만으로 돌릴 수 있겠냐만은, 엄마가 최근 1,2년 사이에 어깨, 무릎 수술을 하고 치료 불가능한 신경성 두통 등 전반적인 건강이 악화된 게 단순한 노화의 결과만은 아닐 것이다.


반백 년 가까운 시간을 부부로, 두 자식을 키우며 멋진 가족의 삶을 이끌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왔지만 70이 다 된 엄마와, 70을 훌쩍 넘긴 아빠.

노년의 삶은 말할 수 없이 슬프고 안타깝다.


“올해 지나고 내년에는 아빠를 요양원에 보내려고”

무서우리만큼 침착하고 단호한 엄마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들려온다.

그 결정을 위해 엄마는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까.


두 달 전, 아빠와 엄마가 이틀 차이로 모두 응급실에 실려갔다. 자식들은 모두 타지에서 가정을 이루고 어린 자식들을 보살피고 있다는 핑계는 차치하더라도, 코로나로 병원 면회조차 불가능했다. 누구도, 아무것도 엄마에게 도움이 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엄마 아빠.

40년이 훌쩍 넘는 세월을 잉꼬부부로 행복하게만 산 부부는 아니었다. 싸우는 날도 많았고, 서로에게 실망한 적도 많았으리라. 하지만 평범했다. 평범하기가 제일 어려운 일이라는데 그 평범함을 가진 부부였다. 싸우는 와중에도 서로를 아끼는 모습이 있었고, 실망을 하지만 또 기대를 품고 내일을 그리는 그런 부부였다.


그런 엄마가 아빠를 더 이상 돌 볼 자신이 없어서 요양원에 보내겠다고 자식들에게 선언한 것이다.

아빠의 정신이 흐려지면서 반복되는 가출, 소란, 대소변 실수. 이미 더 이상 엄마의 체력으로 손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정신력으로 겨우 버텼지만 엄마도 응급실행을 경험하면서 본인이 먼저 떠나게 될 경우 남겨질 아빠와 자식들을 떠올리며 많은 생각을 하신 모양이다. 게다가 엄마의 또 다른 무릎 수술을 계속 미루고 있었는데 더 이상 한계에 다다랐다. 엄마가 수술 후 입원하는 기간 동안 아빠를 돌봐줄 수 없으니 현실적으로 요양원밖엔 답이 없는 상황이다.


“그래, 엄마 5년 고생했으면 많이 했어. 엄마도 살아야지. 요양원은 우리 집 근처로 알아볼게”

“무슨 소리야. 내가 매일 들여다봐야 하니까 엄마 집 근처로 해야지. 엄마가 여기서 알아보고 할 테니까 신경 안 써도 돼. 애들 키우기 바빠도 밥 잘 챙겨 먹고.”


요양원에 보내질 아빠도, 그런 결정을 해야만 하는 엄마도 가엾다. 엄마가 아빠를 위해 조금 더 고생하면 안 될까 하는 마음이 순간 들었다가 이내 자식의 이기심임을 깨닫고 죄책감이 밀려온다.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엄마의 결정이다. 그 누구도 그 결정에 뭐라 할 순 없다.

결혼 후 멀리 산다는 이유로, 어린아이를 키운다는 이유로 부모가 쇠약해지는 걸 알면서도 방치하다시피 한 자식은 더욱이 할 말이 없다.


‘마음의 준비’

이별을 맞이하는데 마음의 준비가 과연 가능할까. 아빠를 보낼 요양원과 날짜를 결정하니 마치 시한부를 선고받은 기분이 들었다. 요양원이 마치 고려장이라도 되는듯한 느낌이었다.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긴장과 두려움.

이름 모를 감정은 칼같이 살을 에는 추위도 느끼지 못하게 한다.

요양원 들어가기 전 아빠를 한 번이라도 더 보려고 주말마다 집에 찾아갔지만 이미 기력과 총명함이 다한 아빠와 추억을 만들거나 대화를 나누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날. 아빠가 요양원에 가던 그날.

엄마는 자식들은 오지 못하게 했다. 평일에 다른 지방에서 오는 것도 무리이고, 어차피 보호자 1인만 동반 방문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엄마는 그렇게 혼자서 아빠를 요양원에 보냈다.

그러곤 며칠을 식사도 못하고 집에서 나오지도 않았다. 아빠를 다시 데려와야겠다며 울고 또 울었다.


엄마의 심정. 부부로서 아빠와 함께 한 그 긴 시간이 주는 감정을 내가 가늠이나 할 수 있을까.

엄마 아빠의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그들의 젊은 시절이 어떠했건, 노년의 삶은 이렇게 안타깝다는 현실과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내 심장 한구석을 묵직하게 짓누른다. 그런 불편한 마음을 간직한 채 나는 또 내 어린 자식들을 보며 아무렇지 않은 듯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최소한 내 부모가 내게 그랬듯, 나도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는 존재가 되리라 다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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