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결이 바람 될 때

by 과학자미뇽

초등학생 때 꿈은 이러했다.


“내 사람들과 잘 놀고, 잘 먹고, 행복하게 잘 살기.”


중학생 때 꿈은 저러했다.


“내 사람들과 잘 놀고, 잘 먹고, 행복하게 잘 살기.”


고등학생 때 꿈은 그러했다.


“내 사람들과 잘 놀고, 잘 먹고 행복하게 잘 살기.”


그렇게 초등학교 때나, 중학교 때나, 고등학교 때조차 한결같이 같은 꿈이었다. 하지만 초등학교와,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에서조차 이루고자 하는 꿈은 명확했더라도 현실로 그 꿈을 이뤄나가기에는 참으로도 애매했다. 어렸을 때부터 축구니, 수영이니, 바이올린 등 뭐 이것저것 해보긴 했지만서도 그건 가끔가다 취미로 즐길 만한 수준이지 진짜 이걸로 뭘 해보겠다 할 무언가는 없고, 그래서 이것도 저것도 아니니 공부라도 해야겠다 싶어 시작한 입시준빈데 그것도 쉽지만은 않았다. 아침 일찍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들으러 간 학교수업 외에도 하교 후엔 국어니, 영어니, 수학이니, 과학 등 전과목별로 듣는 학원수업인 데. 하원 후엔 곧장 독서실로 가서 끙끙 머리 싸매며 들은 수업내용 다시금 돌려보는 수능공부. 그러다 집에서 잠깐 눈 붙이고 인나 또 다시 빡세게 돌리고 돌린 수험생활이었으나. 중간고사, 기말고사, 모의고사 등 학교시험에서 받아오는 받아오는 성적으론 공부 쫌 한다 싶은 상위권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주 못 하는 하위권도 아니고, 그냥 그럭저럭 하는구나 싶을 정도인 어중간한 딱 중간한 중위권대에서 맴맴 돌고만 있을 뿐, 들인 노력과 시간에 비해 얻는 뚜렷한 성과가 없어 뭘 하긴 하는데 이게 하는 건지 마는 건지, 할 맛은 안 나지곤 했다. 그렇지만,



“ 꿈이었다.”


중간고사가 이랬고, 기말고사는도 저랬고, 모의고사는 그랬을지언정 그건 그저 다 꿈이었다. 중간고사를 망쳤대도 괜찮았다. 기말고사가 있으니까. 기말고사도 망쳤대도 괜찮았다. 모의고사가 있으니까. 모의고사까지 망쳤어도 괜찮았다. 2학기가 있으니까. 이번 학긴 쫌 그랬어도 다음 학기엔 조금 더 다시 하면 되고. 다음 학기조차 그랬대도 그 다음 학년에 좀 더 다시해나가면 되고. 앞으로 다시할 시간도 많은데 중간고사를 망쳤든, 기말고사를 망쳤든, 모의고사마저 망쳤든 간에 이미 망해버린 건 뭐 어쩔 수 없다 치고 앞으로 치를 수능 단 하루에 내 모든 걸 다 쏟아붓겠다란 일념하에 다시금 학교에선 학교수업, 하교 후엔 학원수업, 하원 후엔 독서실에서의 빡센 수험공부로 보낸 나날들이었다. 다만, 그렇게나 공부했던 수험생활임에도 불구하고 수능을,


“망했다.”


수능날을 치르고 난 후에 받게 된 성적은 생각보다 좋지 않았다. 아예 공부 하나도 안 했더라면 이렇게 아쉽지라도 않지, 초등학생 때부터 중학생 때를 거쳐 고등학생 때까지 장장 12년. 내가 이제껏 살아왔던 인생의 거의 절반 이상을 이거 하나만 보고 살아왔는데. 그토록이나 해왔었는데. 그랬던 그 결과가 이거라니. 너무 허무했다. 어디 놀러가고 싶어도 꾹 눌러앉고, 졸린 눈 부릅 떠가며 꾸벅꾸벅 해오던 게. 내 열과 성을 다 갈아넣어가면서까지 해왔었던 그 모든 결과가 결국 이거라니. 이것 가지곤 내가 희망하ㄴ던 대학교 가기는 꿈도 못 꾸고. 여태까지 내가 해왔던 그 모든 것이 다 헛지거리가 된 것만 같은 허무한 성적표을 받으니까 막 울적해지기만 했다. 그치만 너무나도 아쉬웠던 수능시험이었음에도 이걸 어떻게 다시 해보기에는 너무나도 많았다. 수능이 끝난 처음 한 두달 정돈 ‘그래 요까짓거 한 번 더 해보자’라고 마음먹곤 해보았으나 학창시절 받은 스트레스들 푼다고 멀리, 멀리 구해다 몰래, 몰래 쪼그려 피운 담배는 이제 집 근처 가까운 편의점에서, 취향에 맞는 담배 한 갑 아무거나 사 피울 수 있게 된 데다 가끔 명절날에나 어른들에게서 쪼록 한 잔 받아먹을 수 있었던 술 또한 허구한 날 술술술술 받아칠 수도 있는데. 급식시절엔 놀러간다 해봤자 기껏해야 만화방이니, 노래방이니, 피씨방 같은 아즈 건전하고도 소소한 유흥문화 뿐만, 그것도 제한된 시간까지 만 아쉽게 즐기다 말 수만 었으나, 교복 벗어제낀 수능 끝난 고3의 다소 불건전하고도 황홀한 음주가무의 한창시절을 맛보고 나니, 갑갑한 독서실 방 한 구석에 틀어박혀 앉아 재미 드럽게도 없는 수능문제들만을 디비다봐야되는 수험생활을 또 한다고? 이렇게나 즐길 거 많은 세상에 그 재미없는 짓을 또 한다는 것은 정말 내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그래, 재수는 뭔 놈의 재수냐, 재수없는 소리 말고 이제부터라도 잘하자고. 공시든 고시든 뭐든 여기서라도 잘 해 나가서 좋은 직장에 취업도 하고, 좋은 사람 만나 결혼도 하고, 내 사람들과 잘 놀고 잘 먹고 행복하게 잘 살자는 꿈을 이루고자 희망찬 하루하루를 달려나가던 와중,


“뭐지?”


뭔가 이상했다. 아침에 눈 떠보니 머리는 지끈지끈거리고, 속도 울렁울렁거리는 게, 간밤에 너무 달렸나? 싶어 근처 약국 가서 숙취해소제들 사먹어도 보고, 며칠간 간 좀 쉬게도 해봤는데. 하루종일 오는 무거운 피로감은 가시지가 않았다. 게다가 들리는 귀는 멍멍하고, 보여지는 눈앞은 침침한 게 나 뭔가 이상하다 싶어 집 근처에 찾아간 이비인후과에서 귀 문제는 없었다. 안과에서 또한 눈 문제도 없었다. 다만 이비인후과에서도, 안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닌 큰 병원 한 번 가보란 소견이었다. 그래서인지 덜컥 겁이 나졌다. 처음엔 그냥 너무 놀아 생긴 술병이겠거니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것은,


“신경 섬유종 제 2형.”


처음들어보는 소리였다. 초등학생 때 이후론 큰 잔병치레 하나 없었는데. 이렇게 큰 병원에 온 것도 낯선데 더 생소한 소리까지 들어 그게 무엇인지 의사선생님께 되물어보니 쉽게 말해 뇌종양이란다. 눈문제도, 귀문제도 아닌 뇌에 문제가 있었댔다. 그래서인지 더더욱 뭔 소린가 싶었다. 아니, 수능이니 공시니 자격증이니 뭐 한다고 나름 열심히 공부는 하는 데도 결과는 그닥인 게, 내가 머리가 나쁜 건가 싶은 생각은 들기는 했어도 공부머린 안 좋아도 몸건강만큼은 엄청 좋다고 생각해왔었는데,내게 이런 병이..? 전혀 생각해본 적 없던 병소식에 그저 멍하니 벙쪄질 따름이었다. 그렇지만 그때까진 나름 괜찮았다. 요즘같이 암도 치료되는 세상에 이것도 수술하면 나아지겠거니 생각해서였다. 그렇지만 나보다 더 놀라신 건 의사선생님이었다. 자그마한 애기 조막만한 것도 아니고, 다 큰 어른 주먹만하게 큰 종양 크기에도 놀랐다는데, 그것도 좌뇌, 우뇌 머릿속이 꽉 채워진 상태로다 이렇게 멀쩡히도 진료실까지 걸어들어오는 것 그 자체에 더욱 놀라셨댔다. 이 정도 크기면 진작에 잘못돼고도 남았을 크기라고. 이게 초등학생 때부턴지, 중학생 때부턴지, 고등학생 때부턴지 정확힌 알 수 없으나, 여러 시간동안 아주 조금씩, 조금씩 자라오며 서서히 커감에 따라 지금 상태까지 커져버린 것 같다 하셨다. 그리고 이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아무런 문제없이 잘 지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이미 증상이 나오기 시작하게 된 지금부터 앞으로의 예후로는, 좋지 않을 수 있다 하셨다. 만약 이 상태로 수술받지 않는다면 종양들은 숨골까지 성장하여 생명이 위태로워 질 수 있을 뿐더러 이만하게 커버린 종양들을 제거하는 수술 과정중엔 다른 신경손상 또한 불가피할 것이며, 그래도 진행하게 될 시엔. 아마도.


“청력을 잃게 될 겁니다. 시력도 흐릿해질 수도 있고요, 보행 또한 지금처럼은 힘들어질 수도 있습니다.”


말씀하시는 의사선생님의 말이 도대체가 그게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었다. 이렇게 잘 듣고있는데. 이렇게 잘 보고있는데. 이렇게 잘 걷고있는데. 그렇게 멀쩡하게있는 내가 저렇게 된다니. 전혀 믿기지도 않고 와닿지도 않았다. 다만 믿겨지지 않아도 믿어지게 됐다. 이해하진 못해도 실감되게 됐다. 즐겨듣던 노랫말이 헷갈려갈수록, 즐겨보던 화면들이 흐려져갈수록, 즐겨가던 걸음들이 무거워져갈수록, 그렇게 되어가는 내가 느껴져갈수록. 그 말들이 진짜임을 체감되게 했다. 그렇지만 희망이었다. 의사도 사람인데, 어떻게 다 알겠어, 분명 이 분이 모르는 수술법이 있을 거라며 다른 병원에 가봤다. 근데 같은 소견이었다. 잃는 것 말곤 방법이 없댔다. 그렇지만 또 희망이었다. 저 분도 사람인데. 어떻게 다 알겠어. 분명 저 분이 모르는 수술법이 있을 거라며 다시 다른 병원에 가봤다. 근데 거기도 그랬다. 잃는 것 말곤 방법이 없댔다. 그렇지만 또 희망이었다. 그 분도 사람인데. 어떻게 다 알겠어. 저 분 또한 모르는 수술법이 반드시 있을 거라며 다시금 다른 병원을 가봤다. 하지만 그곳도 그랬다. 잃는 것 말곤 방법이 없었다. 여기를 가도. 저기를 가도. 그 어디를 가도. 어쩔 수가 없었다. 살기 위해선 잃 는 것이 최선이라는 말밖엔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나는,


밥을 먹었다.


숨을 쉬었다.


그러다 잠을 잤다. 또다시


밥을 먹었다.


숨을 쉬었다. 그리고


잠을 잤다.


술도 마셨다. 담배도 피우고, 사랑도 했다. 그러다 또다시 술도 마셨다. 담배도 피우고, 사랑도 했다. 예전처럼 밥이 맛있지는 않았다. 숨쉬는 일도 멋있다고 느껴지진 않았다. 그저 밥이니까 밥을 먹었다. 그저 숨이니까 숨을 쉬었다. 그저 잠이니까 잠을 자고. 그저 술이니까 술을 마시고, 그저 담배니까 담배를 피우고, 그저 사랑이니까 사랑을 한 후에는 그저,


무너졌다.


더는 맛도 없는. 더는 멋도 없는. 더는 희망도 없고, 더는 꿈도 없는 미래에 부질없이,


무너져내렸다.


많이 들어보긴 했었다. 직접 봐 보기도 했었다. 사람은 그렇게 쉽게 안 죽는단 것도. 청각장애, 시각장애, 보행장애 등 그 어떠한 신체적 장애들을 가지고있음에도 잘 먹고, 잘 놀고, 잘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다는 걸 알고는 있있다. 하지만, 그건 다른 사람 이야기였다. 내 얘기가 아니었다. 여지껏 멀쩡한 몸으로도 뭐 이렇다할 뭐 하나 못했었는데. 뭐 하고 뭐 하려면 있는 힘 없는 힘껏 열심히 한대도 뭐 하나 될까 말까 한 세상인데. 그냥 장애 하나도 아니고 시각이니 청각이니 여러 중증장애들까지 떠안아지게 될 예정된 내가 뭘 어떻게 하라고.. 그렇게 나는 밥을 먹었다. 숨을 쉬었다. 그러다 잠을 잤다. 술도 마셨다. 담배도 피우고, 사랑도 했다. 그저 밥이니까 밥을 먹고. 그저 숨이니까 숨을 쉬고. 그저 잠이니까 잠을 자고. 그저 술이니까 술을 마시고. 그저 담배니까 담배를 피우고. 그저 사랑이니까 사랑을 한 후엔, 그저 무너졌다. 그러다 잠에서 깨면 또다시 밥이니까 밥을 먹고. 숨이니까 숨을 쉬고. 술이니까 술을 마시고. 담배니까 담배를 피우고. 사랑이니까 사랑을 한 후엔, 다시금 그저 무너져내리는 날들이었다. 가뜩이나 안 좋은 몸에 밤새도록 하는 술담배가 나쁠 것이란 건 알았다. 이렇게나 아무 것도 안 한 채 아무렇게나 그저 맘대로 하는 미래 또한 좋지 않을 거란 것은 알고있긴 하지만, 미래?


“좆까.”

그 미래 잘 살아보자고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데, 그 미래가 이따구라니까. 더는 상관없어졌다. 아무렴 다 괜찮아졌다. 잘 살아보겠다고 뭘 해보고, 그게 잘안 되면 아쉬워하고, 그래도 다시 잘 살아보자고 또 해보고, 그래도 잘 안 되면 아쉬워하다 그래도 다시 한 번 더 해보려는 그 마음이. 앞으로 잘 살아나가자란 그 꿈이. 이젠 아무렇지가 않아졌다. 더이상 뭘 하고 뭘 해도, 어차피 다 망가져버릴 거. 굳이 그런 힘든 힘 들여서까지 뭐할 필요도 없고, 굳이 뭐 하고싶은 거 눌러참을 필요도, 굳이 누군가한테 나쁘지 않게 굴 필요도 없이 그냥 지금 현재 내 꼴리는 대로 술 마시고, 담배피고, 되는대로 사랑하다 헤어지게 되면 할 말 못할 말 가리는 거 없는 말들로 퍼부어붓는 등 할 거, 못 할 거 구분없이, 그저 내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살아가면서. 최선을 다해 나를 망가뜨려가면서, 아무런 맛도,아무런 멋도, 아무런 꿈도, 희망도, 미래도 그 뭣도 없는 최악속으로 하염없이, 끊임없이, 부질없이,


절망했다.


몸에 좋지도 않는 술담배로. 맘에 좋지 않은 사랑으로. 마치 알코올 의존증 환자가 술에 의존하듯, 니코틴 의존증 환자가 담배에 의존하듯, 사랑의존증 환자가 사랑에 의존하듯이 취할 때까지 술을 붓고, 피울 때까지 담배로 붙들고, 지칠 때까지 사랑을 븥잡으며 끊임없이, 하염없이, 부질없이,


죽어갔다.



끝도 없는 절망속으로. 꿈도 없는 죽음속으로 내일 없이 오늘만 사는 사람처럼 하루하루를 죽어가다 문득 궁금해졌다.


‘어떻게 했을까’


‘어떻게 버텨냈을까. 이 끝도 없는 절망속울, 이 꿈도 없는 죽음속을, 어떻게 해야 무너지지 않을 수 있을까, 제발 알고싶었다. 다만 그런 거 없었댔다. 그저 무너졌댔다. 평소처럼 계속해서 무너졌댔다. 숨 한 번 내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운 폐암 말기의 절망적인 죽음속에서, 그 어떤 의학적인 방법으론 어찌할 수 없는, 더 이상 손쓸 수도 없는 끝에서. 이제 더는 나아질 수 없을 거란 걸 알면서도, 앞으론 “나아갈 수 없을 거야.” 되내이던 사람. 그래도 “계속 계속 나아갈 거야.” 말했던 사람. “그저 죽어가기보단 살아가기를 택했다.” 말했던 사람, 폴 칼라니티.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끝까지 최선을 나아가던 그의 삶을 담은 책 ≪숨결이 바람 될 때 ≫ 를 읽으며 이 사람은 나와 다른 사람이구나.” 하고 한 줄 한 줄 감동해가면서도, 어딘가 한 점의 바람 정도 나와 닮은 사람이라 와닿았다. 미국에서 뿐만이 아닌 전세계적으로 알아주는 명문대 스탠포드 대학교와, 케임브리즈 대학교 출신에다 영문학과 생물학을 우수성적으로 졸업한 것에도 모자라 심지어 뇌신경 의학에서까지조차 우수한 연구업적들을 거두어낸, 말그대로 문과와 이과를 아우르는 융복합형 불세출의 시대인제였던 그에 비해 나는 지방대 출신에다 하려던 공무원 시험이니 자격증 시험 등 마음처럼 뭐 하나 제대로 이루어낸 것도 없고, 왁자지껄 수다떨기 외 이렇다하게 뛰어난 재능도 없는 나라서. 그와 나는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 우러러보는 한편으론 같은 사람이라 느껴졌다. 학교면 학교, 재능이면 재능, 과거 사람, 현재 사람, 미래 사람 그 어느 누가 봐도 “이 사람 엄청난 사람이구나.” 인정될 만한 사람인데, 하루 16시간 이상, 7년, 그 혹독한 레지던트 수련생활 끝에 비로소 신경외과 전문의로써 앞으로의 창창한 미래를 꿈꿔갈 그였는데. 그 오랜시간동안의 힘들고 고된 수련생활을 끝낼 마지막 해에 덜컥 받게 된 폐암 말기 판정. 이것도, 저것도, 그 어떻게 손 써볼 수도 없는 시한부 상황 속에서 그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그럼에도 원래 하던대로의 과중한 업무를 계속해서 진행하던 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가 어떠한 기분이었을지, 어떠한 마음이었을지, 어떠한 감정으로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는 내가 그가 아니기에 모르겠지만, 난 그랬다. 아무도 할 수 없는 거라면. 정말 방법이 없는 거라면.


“내가 할 거야.”


내가 생명공학이든. 의학이든 그 뭐든 다 공부해서. 내가 의사든 과학자든 그 뭐든 다 되어서, 내가. 내가. 이 내가 내 병을 낫게 할 치료제를 만들겠다고 꿈을 꾸기로 했다. 물론, 그 꿈이 정말 잠꼬대 같은 소리란 건 알았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선 일단 대학교 해당 학과부터 들어가야 될 뿐더러 그 대학에 들어갔다 쳐도 몇 년간 학부생활, 석사생활, 박사생활 등 모든 학업과정를 거쳐야 하는데, 그때까지 내 몸이 버텨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설령 몸상태가 버텨준다 해서 여지껏 그 어떤 훌륭한 의사도 과학자도 그 누구도 못 해냈던 걸,


내가 이루겠다고?


내가 생각해도 그건 정말, 말그대로 꿈 같은 소리였다. 그래도 꿈을 꿨다. 꿈을 꾸고 있으면. 원래 했던대로 꿈을 꾸는 중이면. 꿈을 꾸던 그때처럼,아무렇지도 않게, 아무 일도 없게, 절망도, 죽음도, 그 나쁜 무엇도, 잠시 잊혀지는 것 같아서, 꿈을 꾸던 그때의 나로 살 수 있을 것만 같아서, 그래서, 그저, 그냥, 계속, 입시공부를 했다. 이번엔 꼭 희망하는 대학가자는 마음으론 아니어도. 딱히, 희망하는 대학교를 못 가고, 딱히 희망하는 미래가 올 수 없대도, 딱히 상관은 없어서. 이게 잘 되든, 안 되든 제발 어디론가 가버리고 싶어서. 이대로 가고, 또 가다. 어디든 정처없이 달려가다. 그렇게 잠들 듯 아프지 않게 갔음 좋겠다 싶은 바람 외엔 더는 바랄 것도 없는 마음으로, 평소처럼 공부하러 간 카페였는데. 술 한 잔 걸친 상태라면 모를까, 이런 제정신 아닌 맨정신 상태론 처음인데. 이게 되려나 싶었다. 그런데 잘 되었다. 내가 앉은 자리 바로 옆 테이블에 앉은 사람. 예전같음 말도 못 꺼내고 그냥 속으로만 ‘아, 굉장히 예쁜 사람이구나.’ 하고 말 사람인데. 몇 번 죽어봐서 그런지. 까여도 딱히 무서울 건 없어서 되면 되고 말면 마는 마음으로 혼자 공부하고있는 그 사람에게 술 먹다 라이터 불 좀 빌리듯 태연스럽게 "저기, 제가 샤프심이 다 떻어져서 그런데 혹시 샤프심 한 개만 빌릴 수 있을까요?" 말 걸게 되었다. 그녀는 “아, 네” 하며 테이블 위에 놓인 샤프통에서 샤프심 하나를 꺼내어 나에게 건네주었다. 나는 감사하다며 잠시 물러났다가 새로 주문한 커피 한 잔 들고 와서 샤프심 빌려줘서 고맙다고, 이거 맛있게 드시라며 살며시 들이댔다. 깜짝 놀란 그녀는 "이런 것까지 안 해 주셔도 괜찮은데.. 정말 감사해요, 잘 마실게요" 내가 내민 잔을 받아들었다. 나는 곧바로 "그럼, 진짜 괜찮으시다면 혹시 번호도 하나도 빌릴 수 있을까요?" 연락처를 물었다. 예쁘긴 예뻤는데 살짝 차도녀스레 냉랭하도로 예뻤던 그 사람은 아, 저 남자친구 있다며 정중 거절로 시크하게 되받아쳤지만, 예전같았으면 그냥 아쉬워하면서 물러갔을 텐데, 그땐 별로 아쉬울 게 없어서인지 아무렇지도 않게 “ 아, 그러시구나. 그럼 그냥 친구해요, 같이 공부도 하고, 같이 수다도 떠는 그런 친구.” 하자고 하는 나를 보며 별 희한한 사람 다 보겠네 싶은 눈으로 그녀는 잠시간 갸우뚱해하더니 이내 쿨한 말투로 "뭐, 그래요 그럼,공부친구라면야.." 말하는 그녀의 번호를 받게 되었다. 그리곤 오늘 샤프심 빌려줘서 고마웠다고, 덕분에 공부 잘 됐다며 보낸 문자를 시작으로 가끔씩 문자 주고받으며 알게 된 그 사람은 대학생이었다. 나이는 나와 한 살 차이고, 딱히 그 카페에서만 공부하는 건 아니고 학교 과제나 공부할 땐 집보단 이 카페 저 카페 가는 걸 좋아한다는 등등 연락을 주고받는 그 사람에 어차피 우리 한 살 차이밖에 안 나는데 그냥 편하게 말 놓자고 하는 나. 그리고 참나, 그런 건 연장자가 먼저 말하는 거 아니냐고, 내가 니보다 누난데 이게 확 그냥 어이없게 웃고 지낼 수 있게 될 정도로 친근한 사이로, 마침내 오게 된 그 자리. 마침 남친이랑 싸워서 기분도 뭐 하단 그녀에 이제껏 살아오며 터득한 개그, 유머, 농담 등 내가 아는 모든 웃길 것들을 총동원하여 ‘이거 잘 하면 오늘 어떻게 잘 되겠다’ 싶은 흑심으로 최선을 다하여 그녀의 기분을 업되게 하기 위한 재롱 한 판 신나게 떨어주는 술자리 분위기가 아주 좋았다. 이 얘기에 꺄르르 저 얘기에 꺄르르 재밌어하는 그녀를 보며 ‘좋았어, 오늘 뭔가 되겠다.’ 싶어 이 분위기 더 무르익어가도록 열심히 달려가던 와중 문득 그녀가 말을 꺼냈다. “근데, 저번부터 물어보고 싶던 거 있었는데..”로 시작해서 말할 때 중간중간마다 응? 뭐? 자주 되묻는 것도 그렇고, 술 마시러 온 여기까지도 비틀비틀 걷는 것도 그렇고, 혹시 어디 안 좋은 거냐고 묻는 그녀에 순간 뜨끔했다. ‘아, 최대한 괜찮 게 보이려 했는데, 안 괜찮아 보였구나.’ 싶었다. 그래도 뭐 숨긴다고 숨겨질 것도 아니고 어차피 나중엔 알게 될 거였으니 최대한 분위기 안 깨도록 대충 뇌종양이라고 말했더니 역시나 깜짝 놀란 반응이었다. 꽤나 익숙하게 본 반응이라 그리 놀랍지는 않아서, 아무렇지도 않게 “자, 자 괜찮으니까 그냥 적셔.” 하는 나에 뭐가 괜찮냐고, 그만 마셔야 되는 거 아니냐며 걱정해주는 반응 또한 익숙했다. 다만 놀랐다. 아니, 놀란 것보단, 처음 보는 거라 그런지. 참 이상했다. 처음에는 깜짝 놀라다가, 이내에는 많이 걱정해주다가, 재미없는 내 얘기로 술자리가 무뎌져갈수록. 주고받는 말들이 흘러갈수록. 점점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그렁그렁 눈물방울들이 맺히더니. 이제에는 뚝, 뚝 흘리고있었다. 그래서일까. 많이 아팠겠다고. 많이 힘들었겠다고. 나를 토닥토닥 안아주는 그 사람에 처음의 흑심은 얇디얇은 샤프심처럼 똑 하고 부러지듯, 괜찮게 씻겨내려갔다. 토닥토닥 안아주는 그 이상까진 안 가도 괜찮아졌다. 그리고 그날부론 터치가 잦았다. 뭘 하고 뭘 하려 했다 하면 아픈 얘가 뭔 술이냐고, 아픈 얘가 뭔 담배냐며 초코우유니 딸기우유니 막대사탕 같은 건전한 기호식품들만으로 쩝,, 하게 됐다. 하지만 괜찮았다. “이야~ 여기 분위기 죽이는데 오늘 어떻게 한 번..?” 헛수작부리려다 “이게 죽을라고, 꿈 깨라.” 컷 당해도 괜찮았다. 그 사람 입에 맞춘 매운 맛 최대치로 시킨 엽기적이도록 매운 떡볶이 한 입에 매우 매워 죽겠다며 수선떠는 내 모습에 남자가 이것도 못 먹으면 안 된다며 엄살떨지 말라 놀려대도 괜찮았다. 이게 괜찮든 저게 안 괜찮든 그냥 뭘 해도 다 괜찮아졌다. 건장한 남자 사람 친구들끼린 그냥 만화방 가서 라면 한 그릇에 만화책 한 권만 쥐어져도. 코인노래방 가서 목청껏 쥐어짜줘도.피씨방 가서 게임 몇 판 쎄려주다 잘 안 되면 술이나 한 잔 빨러 동네 술집 가는 것만으로 “와, 오늘 하루 참 알찼다!”고 생각했는데. 즐겨가던 만화방 대신 청계천길 한쪽 구석탱이에 있는 헌책방에서 이 책, 저 책 둘러보다 출출해져 푸드트럭에서 큐브 스테이크니, 알새우 구이니 쫘르르륵 즐비한 푸드트럭들 한 트럭은 사먹었는데도 모자라 또 먹으러 간 파스타. 즐겨부르는 코인노래방 대신 저기 홍대 버스킹 보자며 이 곡, 저 곡 구경하다 배부르게 먹은 초밥. 피씨방 대신 벚꽃놀이 시즌이라며 북적북적 한강공원에서 텐트 빌려 겨우 빌고 빌어 허락된 맥주 한 캔과 피자, 치킨, 편의점 음식 몽땅 털어 짠, 짠, 짠 하기 등, 그 사람이 짠 놀이코스는 다 즐거웠다. 노는 걸 좋아하긴 하면서도 막상 “뭐 할까?”, “뭐 먹을까?” 물어보면 “음.. 음..” 얼버무리다가“그냥 아무 거나” 하는 내게 얘가, 얘가 이렇게 놀 줄 몰라서야 나중에 여친 생김 어떡할려고 그러냐며, “여기, 내가 아는 맛집인데..”, “저기 내가 아는 핫플인데..” 나만 딱 따라오라는 여자 사람 친구의 감성 따라 이끌려 간 곳곳마다 “우와, 멋있다”, “우와, 맛있다”, “우와아아아 짱이다.” 감탄사만 터져나오는 소녀감성으로 전부 예뻤다. 이런 곳도 있었다는 게. 이런 것도 있었다는 게. 너무나도 예뻤다. “여기가 대학가 맛집거리야.” 하며 맛보는 음식도 너무 맛있었고, “여기는 성수동 카페거리!” 하며 멋보는 음료들도 멋있었고, 여긴 이태원 핫플거리 중에 찐으로 븐위기 짱이란 루프탑 카페에 올라다 얼큰하게 취해 시끌벅적하게 떠들며 노는 사람구경도, 화려하게 반찍이는 도시의 야경만큼이나 반짝반짝 빛나는 밤하늘도 너무너무 예뻤다. 그리고 그 사람과 함께면 시끌벅적한 번화가라도 괜찮았다. 잘 듣지 못하던 내게 바짝 붙는 귓속말로 속삭여줘서. 붐비는 대학가라도 괜찮았다. 잘 보지도, 잘 걷지도 못하는 내게 바짝 붙어 여기는 위험하니까 저기로 가고, 저기도 힘겹게 걷는 나에게 딱 붙어 부축해가줘서. 번화가든. 대학가든. 그 어딜 가든, 그 사람과 같이가는 모든 곳 모든 것 모든 게 다 좋았다. 그래서 두 손 꼭 모아 바래보았다.


‘ 이렇게라도 괜찮으니까. 그렇게라도 다 좋으니까. 그냥 이대로 있게 해주세요.’


그냥 오늘은 이 거리, 내일은 저 거리, 그 어떤 거리거리라도 다 좋으니 그저 이대로만 살아갈 수 있음 좋겠다 싶었다. 하지만 그건 꿈 같은 소리였다. 시간 가는 줄도 몰랐던 그 사람과의 하루하루가 흘러갈수록, 예정된 흐름은 어김없이 진행됐다. 그 사람과 좋은 시간들을 보내면서도 그칠 줄을 모르게 나는 조금씩, 조금씩 더 나빠졌다. 청력이 더 먹먹해져갈수록. 시력이 더 침침해져갈수록. 걸음이 더 위험해져갈수록. 나의 마음 또한 몸을 따라 점점 악화돼어갔다. 웃음 섞인 농담도. 웃음 섞인 표정도. 웃음 섞인 마음도 없이. 곧 죽을 것 같은 사람처럼 불안해하고, 초조해하고, 두려워하고, 무너져갔다. 그 사람은 그런 나를 보며 아니라고, 너 안 죽는다고, 나 여기 있으니까, 앞으로 갈 데 많으니까, 맛있는 것도, 멋있는 곳도, 엄청 많이 있을 거니까, 마음 편하게 먹으라고, 다 괜찮을 거라는 그 사람을 보면 다시 괜찮아졌다. 그렇게 언제 그랬냔 듯 다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게 놀다가도 불안해지고, 초조해지고, 두려워지고, 다시금 무너졌다. 그러면 그런 나를 보며 그 사람은 아니라고, 너 안 죽는다고, 나 여기 있으니까, 앞으로도 맛있는 거랑 멋있는 곳 갈 데 많으니까, 마음 편하게 먹으라고, 다 괜찮을 거라는 그녀를 보면 다시 또 괜찮아졌다 그렇게 언제 그랬냔 듯 다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게 놀다가 다시 불안해지고, 초조해지고, 두려워지고, 또다시 무너지면, 그런 나를 보며 그 사람은 아니라고, 너 안 죽는다고, 앞으로 더 맛있는 거, 멋있는 곳 갈 데 많다고, 나 여기 있다고, 다 괜찮을 거라는 그 사람 또한 조금씩 지쳐가고있다는 건 알고있었다. 나 아니라도 학업문제든, 진로문제든 연애문제든, 집안문제 등 그 사람만의 고민거리도 많을 텐데, 가족도, 남자친구도, 심지어 오래 안 친구도 아니고 그냥 얇다란 샤프심 한 개 정도로 언제든지 끊어낼 수 있을 사람인데도 여기 지금 좀 와달라 불안해하면 곧장 내게 달려와주고, 저기, 지금 나 미치겠어 막 두려워하면 괜찮을 거라며 토닥토닥 달래와주는 그 모든 것 들이 그 사람에게 부담이 될 거한 것도 알고있었다. 하지만 이러면 안 된다는걸 알면서도 계속 가졌다. 그러면 그 사람도 무거워질 거라 생각하긴 하면서도 불안할 때, 초조할 때, 두려울 때마다 먼저 그 사람부터 생각나졌다. 그럴 때마다 그 사람은 그런 나를 받아줬다. 그럴 수 있다며, 그래도 된다며, 그런 날들을 받아줬다. 그렇지만 그러했던 그 사람 또한 나와 같은 사람이었다. 아니, 어쩌면, 도피할 수 있다면 그 어떤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고 망가지는 나보다, 더 여린 사람이었다. 길을 걷다 지나칠 고양이 한 마리에도 한참을 안아주던 그 사람인데. 한 번 보고 지나칠 영화에도 그 자리서 한동안을 훌쩍이던 그 사람인데. 한 번도 아닌 몇 번을, 아니, 몇 십번을, 아니, 몇 백 번을 셀 수 없을 정도로 수없이 무너지는 나를 계속해서 일으켜주던 그 사람의 마음은 조금씩, 조금씩 야위어갔다. 그래서 결국엔 미안하다고, 계속 네 힘이 되주고 싶은데, 나도, 너무 힘들어서, 더는 해 줄 수 있는 게 없을 것 같다고, 그냥, 우리 연락하지 않는 게 서로에게 좋을 것 같다는 그 사람이었다. 하지만, 난 하나도 좋지 않았다. 좋아져서. 이미 많이 좋아져버려서. 이대론 안 됐다. 이렇겐 못 보냈다. 문자메시지로든, sns든, 그 사람에 알잖아, 나 너 좋아하는 거, 나 한다면 한다는 거, 알잖아. 너 이대로 가면, 나 그냥 확 죽어버릴 거라며 내 목숨 갖고 위협하며 이미 마음 정리 된 사람을 다시 불러내고. 그 사람은 놀라며 그러지 말라며 달려와주고. 그럼 또 언제 그랬냔 듯 다시 괜찮아지고. 그러다 다시 또 무너지고. 그럼 그녀는 이미 힘없는 상태로 내게 또 힘을주고, 몇 번이고, 몇 십 번이고, 몇 백 번이고, 이러한 패턴들로 수없이 반복되어가다 어느 날 다시 만나게 된 그 사람은 울고있었다. 이럴 거면 왜 친구했냐고.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왜 이렇게까지, 도대체 나한테 왜 그러냐고, 너 아니라도 힘든 거 많은데, 너까지 이러면, 숨막혀, 너무 지쳐, 너무 힘들다며 원망하듯 서럽게 우는 그 사람에 그제서야 알겠다고 했다. 이제는 그러지 않겠다고 했다. 이제는 연락하지 않을 거고, 다시는 만날 일도 없을 거고, 처음부터 그랬듯이, 연인도. 그렇다고 친구도 아닌. 그냥 길거리 지나가며 지나치는 수많은 사람 중 한 명으로. 그렇게 모르는 사람처럼 지내기로 했다. 밥도 잘 먹을 거고. 공부도 열심히 할 거고. 잠도 잘 잘 거고. 그렇게 잘 살겠다고 했다. 근데, 밥이니까 먹긴 먹어도 채워지진 않았다. 공부니까 하긴 해도 들어가진 않았다. 잠이니까 자긴 해도 쉬어지진 않았다. 그래서 집이라서 그런가 싶어 집밖에서 밥을 먹어도 채워지지가 않았다. 공부 안 하고 놀았는데도 들어가지가 않았다. 밤잠없이 갔었던 곳곳들도 전혀 예쁘지가 않았다. 여기 맛집이엇는데. 저기도 핫플이었는데. 그렇게나 예뻤었는데. 하나도 그렇지가 않았다. “우와” 하게 맛있게 먹었던 것들이. “우와” 하게 멋있게 보았던 곳들이. 맛있지가 않았다. 멋있지가 않았다. 분명 같은 메뉸데. 분명 같은 장손데. 모든 게 다 그대론데. 평소대론데. 단 하나도 괜찮지가 않았다. 여기 번화가를 가봐도. 저기 대학가를 가봐도. 여기저기 맛있어 하는 사람들, 멋있어 하는 사람들, 즐겁게 웃으며 재밌어 하는 사람들 보며 밤하늘을 올려다봐도. 이상하기만 했다. 진짜 맛있었는데. 정말 멋있었는데. 여기도. 저기도. 전부 다. 참 예뻤는데. 이 거리와 저 거리들. 다 같은 거리들. 음식들과, 풍경들, 다 같은 먹거리, 다 같은 볼거리. 하나도 빠짐없이, 똑 같은 거린데단지 그 사람 한 명만 없게 된 것 뿐인데. 그 사람이 없는 차가운 도시는 아무 맛도, 아무 멋도, 그 무엇도, 괜찮지가 않았다.


알겠다곤 했어도 하나도 모르겠었다. 그러지 않겠다곤 했어도 한 번만 더 그리워졌다. 아침, 점심, 저녁, 밤 시시때때로 그 사람이 생각났다. 그 맛집에서 맛나게 먹던 그 모습이. 그 핫플에서 재밌게 놀던 그 모습이. 자꾸자꾸 생각났다. 다시 찾은 청계천 헌책방에서도. 다시 찾은 홍대 버스킹장에서도. 다시 찾은 이태원 루프탑에서도. 그 사람이 보였다. 다시 갔던 번화가에도. 다시 갔던 대학가에도. 다시 맛보는 먹거리들과, 다시 멋보는 볼거리들, 여기도. 저기도. 이것도. 저것도. 그 무엇에도. 다. 그 사람이 있었다. 밥 먹고있을 때도. 공부하고 있을 때도. 자려고 누워있을 때나, 자고있는 꿈속에서조차 따라오는 사람이라서. 잠에서 깨면 흩어져갈 꿈결처럼 오늘 하룻밤을 흘려도, 이틀 밤새도록 흘려도, 다음날까지도 먹먹하고, 그 다음의 다음날 또한 불안하고, 초조하고, 그렇게 몇 밤을 더 흘러가버릴지라도. 아무리 보고싶어도. 아무리 부르고싶어도. 같이 걷고만 싶고. 같이 먹고만 싶고. 같이 보고만 싶은 사람이라도. 눈앞의 오늘도. 다음의 내일도. 다음의 모레도. 훗날의 언젠가도. 그 사람 없이 사는 오늘이. 그 사람 없는 내일이. 그 사람 없는 매일이. 너무 무서웠다. 아직 난 그대론데. 여기에도. 저기에도. 그 어디에도. 다 그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 없는 오늘을 버텨낼 내가. 그 사람 없는 내일도 찢겨질 내가. 그 사람 없는 매일을 죽아갈 내가. 너무나도 무서웠다. 근데 그래도,


살아지더라.


당장이라도 멎을 것만 같아도. 금방이라도 죽을 것만 같아도. 계속 해서,


살아지더라.


평소처럼 밥도 먹고. 평소처럼 공부하고. 평소처럼 잠도 자면서, 그렇게,


살아가더라.


잘 되지는 않아도. 밥이니까 먹으면서. 잠이니까 자가면서. 꿈이니까 꿔가면서 준비했던 입시시험도 끝내 예비번호도 못 받을 정도로 망쳤대도. 눈은 점점 멀어가면서. 귀는 점점 먹어가면서. 머리부터 발끝 그 어디라고 할 것 없이 망가지고 망가져가며 버텨내다 받은 수술 끝에 예정대로 장애판정을 받게 된 몸에도. 계속해서,


살아가더라.


사는 것 보다. 이대로 죽는 게 더 무서워서. 몇 번이고 무너져도. 몇 번이고 죽어나도. 그냥 계속. 몇 번이고 찢어지고. 몇 번이고 갈라져도. 그냥 계속. 밥이라서 먹는 게 맛은 없어도. 공부라서 하는 게. 재민 없어도. 잠이라서 자는 게. 숨이 막혀온다 해도 그냥 계속계속해나가다 보니까 희망하는 대학교에도 붙고. 애매하게 보이는 시력도. 모호하게도 안 들리는 청각도. 내 맘처럼 안 듣는 팔다리까지 뭐 어디라고 할 것 없이 망가진 몸일지라도. 그저 그런대로,


살아지더라.



다 망가져간 어쩔 수 없는 일에도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있었고, 그걸 좀 더 잘해보려고 내일 또한 내 일을 할수록. 그렇게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갈수록. 한 번만 그리워했던 그 사람이. 한참을 그러했었던 그 사람이. 점점 흐릿해져가더니 어느 순간부터 꿈속에서,


사라지더라.


그 사람 없는 하루를 불안해하고. 초조해하고. 두려워하던 날들에서 이젠 밥도 잘 먹어지고. 일도 잘 하여지고. 잠도 푹 자게 되는 일상으로 흐릿하게, 희미하게,


바래지더라.


그래서일까. 그 사람이 조금씩, 조금씩 바래져갈수록 더 짙어져가는 게 있었다. 다시 그 사람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라기보단. 만약 그때 그 사람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난 다시 살아갈 수 있었을까 하는 마음이 점차 선명해져가서. 그제서야 뭐라도 말하곤 싶었는데. 어떻게 말해야 되는지. 뭐라고 말해야 되는지. 이렇게도 해보고 . 저렇게도 해보고. 많이 생각해보다. 책읽는 거 좋아했잖아. 그래서. 쓸 말을 고르고 또 골라. 더 괜찮고, 더 예쁜 말로 또 고르고 골라. 그렇게 계속계속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보니. 이제서야 말하게 됐네. 데려가준 곳마다 웃게 해줘서,


고마웠다고.


바래다주는 마지막까진 못 웃어줘서,


미안했다고.


직접 말하러 가면, 아직 불편해하진 않을까 해서. 마지막 그때 이후로 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에서야 이렇게 멀리서나마 가까운 곳에 글을 남겨. 먼저, 좋은 사람과 예쁘게 결혼한 거 정말 많이 축하하고, 고마워. 이뤄줬잖아. 내 꿈, 내 사람과 잘 먹고, 잘 놀고, 행복하게 잘 살아갔던 거. 그리고 지금도 이루어주고 있잖아. 내 사람들과 잘 먹고, 잘 놀고, 행복하게 잘 살기 위해 쓰는 이 글, 그 글은, 그 꿈은, 언젠가 너가 내게 속삭여줬었던 그 숨결이기에. 언제나 내게 불어와줬던 그 끔결이기에. 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조차 계속. 아직도 잊지 않고 선명하게 기록할 수 있는 거라서. 아주. 선연하게. 따스하게, 소중하게. 기억할 수 있는 거라서. 덕분에, 이렇게 그 꿈을 이어갈 수 있잖아. 그리고. 미안했어. 많이 웃게해주지 못해서. 많이 울게만 했어서. 마지막까지조차 맘 아프게만 해서. 그리고. 고마웠어. 또, 또, 또 하는 재미없는 내 농담에도 어이없게 웃어줬어서. 또 미없는 내 세상을 웃게 해줬어서. 또 재미없는 내 얘기에도 나의 이야기처럼 울어주고, 아파해주고, 다 괜찮게 해줬어서. 세상엔 맛있는 것들도. 멋있는 곳들도. 이렇게나 재밌는 게 많다는 것들도. 많이 알게 해줬어서. 그런 너를 알 수 있었어서. 너무. 너무. 고마웠어. 아파했던 나의 삶에 꿈만 같은 길을 같이 걸어가줬었던 너처럼. 아플 때나. 힘들 때나. 지칠 때나. 슬플 때나. 기쁠 때나. 그 어느 때나. 언제라도 내 옆에 꼭 달려와주었던 너처럼.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매일도. 그 어떤 날도. 그 어떤 순간도. 그 언제까지라도. 앞으로 걸어나갈 너와, 너의 남편 분과, 너의 가족들과, 너의 친구들과, 그밖의 너가 만난 너의 모든 사람들, 모든 시간들이 다 예쁜 꽃길만 걷길. 더는 아픈 것 없이, 항상 건강만 하길. 그렇게, 언제나, 항상, 길이길이, 오늘보다 매일 더 행복하게 잘 살아가길 바래. 그럼 안녕. 잘 지내. 나의 꿈이 되어줬었던 사람. 나의 꿈이 이루어지도록 예쁜 추억들을 불어줬었던 사람. 그리고. 진심으로. 정말. 많이. 너무나도. 많이. 사랑했었던.


- 내 사람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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