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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성철 Sep 01. 2020

메신저가 죽었다

설익은 소리, 완성된 소리



밤 10시 조금 넘어 얼마 전 써 논 시를 읽어 보고 어색한 문장을 퇴고 중이었다.

초안이란 늘 그렇듯 갓 태어난 아기처럼 온갖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

뼈대에 살과 근육을 붙이고 혈관을 만들어 혈액을 투여해야 한 편의 시가 완성된다.

이렇게 완성해도 능력이 부족한지 늘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내 인생에 완성된 문장은 없을 것이다. 있다면 죽음일 것이다.

정신을 집중하고 감정을 가다듬어 차분한 마음으로 읽어 내려간다.    


그때,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들린다.

13층의 아파트에 귀뚜라미 우는 소리라니,

잘 못 들었나 싶어 숨소리도 죽여 가며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나선다.

서재 옆 베란다에서 소리가 난다. 베란다 의자에 가만히 앉아 소리를 따라간다.  

눈 가는 곳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솜사탕처럼 부풀어 있다.

소리 뒤에 몸을 숨긴 귀뚜라미를 찾으려 이곳저곳을 기웃거려 본다.

(시인이라면 소리에 담긴 뜻을 찾아야 하는데, 몸통을 찾고 있으니.)

어설픈 인간의 낌새를 눈치챈 울음이 멎었다.

다시 울기를 기다렸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울지를 않는다.

어디선가 나의 행동, 숨소리 하나, 지켜보는 감시의 눈초리가 느껴져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왔다.

오랜만에 들어 보는 귀뚜라미 소리, 도시의 13층 아파트에서 귀뚜라미 소리를 듣다니.     


어떻게 왔을까. 어제 지나간 태풍을 타고 왔을까.

나에게 전할 간절한 사연이라도 있는 걸까.

저 완성된 소리를 내기 위해 어떤 대가를 치렀을까.

나는 설익은 소리와 글을 아직도 퇴고 중인데.


쓸쓸하고 외로움의 소리로 자리 잡기까지, 얼마나 많은 문학 작품에 소리를 빌려주었을까?

사랑의 편지를 전해주는 메신저 역할을 하고, 실연의 아픔을 대신해 울어 주고.

배경 음악으로 숨어 지독한 이별도 지켜보았을 것이다.

카메오나 우정 출연도 아니면서, 관계자로부터 돈 한 푼 받지 않고.     


나도 당신께 간절히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끝내 전하지 못한 말을 수없이 되새기며,

우산도 없이 빗속을 쓸쓸히 되돌아왔다.

그 골목에는 너와 내가 울고 있었다.

너는 온몸으로 울었고, 나는 마음으로 울었다.


귀뚜라미가 내게 전하려는 말이 무엇일까?

궁금증을 뒤로하고 서재로 들어와 노트북을 펼치고 퇴고 작업을 이어간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들린다.

애써 무시하기로 하고 문장에 집중한다.

집중하면 할수록 키보드의 자음과 모음이 소리를 따라 어지럽게 흩어졌다 모이기를 반복한다.

귀뚜라미가 베란다 방충망에 붙어 있나 싶어 방충망을 툭 쳐 본다.

우는 소리가 멎었다.

그렇게 몇 번의 반복이 있고 난 뒤 새벽이면 제 갈 길을 가겠지 하고 잠이 들었다.     


새벽녘 잠에서 깨어나 다시 노트북을 펼쳤다.

내 귀를 의심했다.

아직도 귀뚜라미가 울고 있다.

무시하자! 들리지 않는다! 집중하자!

아무리 애를 써도 이미 귀와 마음은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나섰다.

어디에 있는지 찾아야 밖으로 내보낼 텐데, 베란다의 짧은 새벽을 샅샅이 뒤져도 찾을 수 없다.

이쯤 되자 인내력이 한계점에 도달했다.

에프킬라 용액을 베란다 문틈에 조금 뿌렸다.

날이 밝고 나서 베란다로 나가 보았다.

작고 검은 벌레 한 마리가 바닥에 엎드려 죽어 있다.

살려 보내려 애를 썼건만 결국, 주검 하나 창문 밖으로 날려 보낸다.     


이왕 기다린 것 살려서 내보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후회가 밀려온다.

눈을 감아도, 책을 펼쳐도,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머릿속을 맴돈다.

집중력이 떨어지고 비뚤비뚤 죽은 문장들이 쏟아져 나온다.

마음속, 전하지 못한 오래된 문장 하나 사라졌다.

작은 소리, 작은 생명 하나 담지 못하는 마음이 무슨 글을 쓰겠는가.

오늘은 한적한 산책길에서 참회의 시간을 가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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