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춘란春蘭 50 화분을 키워본 적이 있습니다.
한 촉에 15만 원에 사기도 하고, 주로 지인으로부터 분양을 받았습니다.
춘란의 꽃을 피우기 위해 나름대로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그래도 부족한 지식이 많아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내 방식대로 온갖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꽃대가 올라오고 꽃봉오리가 보이면 강남에 빌딩을 한 채 올린 성취감을 맛봅니다.
그런데, 초보자가 꽃을 피우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11월부터 다음 해 2월까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50개의 춘란 화분을 하나하나 살핍니다.
천체 관측 망원경으로 우주를 관찰하듯 꽃대가 올라왔는지 화분마다 찾고 또 찾습니다.
꽃대가 화분 위 돌을 들어 올린 미세한 흔적이 있는지 확인 또 확인합니다.
(부모님께 안부 전화를 그렇게 열심히 했더라면 하는 반성도 하면서)
영양제1 물1000의 비율을 맞추려고 약국에서 주사기도 샀습니다.
약사분이 무슨 용도로 사용할 거냐고 물어봅니다.
개미 팔뚝 핏줄에 영양제 주사 놓으려고 하려다,
마약 하는 것 아니라고 거듭 이야기했지만 그냥 웃기만 합니다.
썩은 뿌리는 잘라주고 소독도 해야 한다기에 의료용 가위와 칼 핀셋도 샀습니다.
집 거실에 흰 장갑, 주사기, 가위, 칼, 핀셋을 펼쳐 놓았습니다.
옆에서 며칠째 지켜보던 감시자가 의과대학 갈 거냐고 툭 던집니다.
춘란에 정성을 쏟다 보니 하루에 대여섯 번씩 화분을 들었다 놓았다 합니다.
비스듬히 세워 곁눈질로 살펴보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화분 위에 얹혀있는 돌들을 뒤집어 봅니다.
젖니가 나왔는지 하루에 대여섯 번씩 아이의 입을 강제로 벌려 확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말 못 하는 춘란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겠습니까?
그나마 올라온 꽃대도 안착을 못하고 시들어 버립니다.
이러다간 강남에 빌딩이 아니라 야산에 천막도 못 치겠습니다.
춘란의 입장에서 정성을 받은 것이 아니라 스트레스를 받은 것입니다.
이쯤 되면, 주인의 발걸음 소리와 숨소리는 불안과 공포의 대상입니다.
그러니, 스트레스로 가득 찬 춘란이 꽃을 피우겠습니까?
대부분 꽃은 자연 속에서 1년에 한 번 꽃을 피웁니다.
국화꽃이 만개한 화분을 거실에 두고, 꽃이 질 때까지 눈으로 즐기다 꽃이 지고 난 뒤, 베란다 구석에 버리다시피 놓아두었습니다. 줄기마저 시들자 화려했던 시절까지 시들어 덩그러니 화분만 남았습니다.
쩍쩍 갈라진 화분 위의 흙을 바라보니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에 쓸쓸하기만 합니다.
1년 후, 잊고 있었던 그 쓸쓸한 화분에 새싹이 나고 줄기가 불어나 잎이 무성해지더니, 작년의 수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아주 예쁜 국화꽃을 피웠습니다. 각종 영양제를 주고 온갖 정성을 들여 키운 춘란은 그 귀한 꽃대를 보여주지 않는데, 아무렇게나 버려둔 국화는 꽃을 피웠습니다.
누구의 관심도 눈길도 없는 베란다 구석에 쪼그려 앉아, 춘란에 물을 뿌릴 때 튕겨 나온 젖동냥 물을 먹고 국화가 꽃을 피운 것입니다.
정신적, 경제적으로 엄청난 공을 들인 춘란은 먹튀를 했고,
천덕꾸러기로 방치한 국화가 효자로 돌아왔습니다.
관심도 적당한 거리 유지가 필요한가 봅니다.
지나친 관심은, 상대방의 자유와 사고의 구속을 안겨주고, 또 다른 다툼의 소지를 남깁니다.
일정한 거리에서 지켜봐 주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배려이고 믿음이고 신뢰가 아닐까요?
아들딸이 하는 일이 꽃처럼 활짝 피기를 바라는 것은 모든 부모님의 마음입니다.
독창적인 자기만의 색깔로 세상 풍파에 잘 적응해, 매년 꽃을 피울 수 있는 자양분을 가지도록 옆에서 차분하게 지켜봐 주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지나친 관심은 간섭으로 이어지고, 간섭이 심하면 갈등으로 이어져, 그 갈등이 오래 지속되면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기 쉽지 않습니다.
설령, 회복한다 해도 서로의 마음에 상처를 남깁니다.
저마다 다른 인간의 능력을 인정하고,
능력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최대한 발휘해,
저 나름의 꽃 한 송이 피우기를 차분히 기다려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