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내 이름에는 '나'가 없다.
“네 이름은 종구(宗求)다.”
증조부는 장차 내가 종손 역할을 충실하게 하길 바라면서 이런 이름을 지어주었다. 내가 원해서 ‘종구’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아니다. 내가 누구에게 나를 종구라고 불러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언제부터인가 나는 종구로 불렸다. 누가 “종구야”하고 부르면 고개를 돌려 그와 눈을 마주쳤다. 마치 파블로프의 개처럼. 그 이름에 조건화된 것이다. 종구를 나로 여기고 60년이 넘게 살았다.
사람들은 다양한 이유로 개명(改名)을 한다. 가까이 알고 지내는 사람 중에 이름을 바꾼 사람이 꽤 많다. 나도 이름뿐만 아니라 성(姓)까지 바꾸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냥 살기로 했다. 이름이나 성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또 참된 ‘나’가 아니란 걸 잘 알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1957년 6.25 전쟁이 끝나고 4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기에 결혼을 하였다. 두 사람 모두 21세였다. 전통혼례를 하였다. 어머니의 서랍 속에 있던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병풍을 배경으로 결혼사진을 찍었다. 흑백사진이었다. 아버지는 사모관대 차림을 하였다. 어머니는 족두리를 쓰고 활옷을 입었다. 오른쪽에 선 아버지는 큰 얼굴을 비스듬하게 기울이고 있었다. 왼쪽에 선 어머니는 양 볼에 연지를, 두 눈썹 사이에 곤지를 찍은 채 동그란 눈으로 정면을 바라보면서 사진을 찍었다. 동갑인데도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훨씬 더 어려 보였다. 아버지와 함께 살지 않았던 탓일까? 어린 내게 그 사진은 낯설고 이상해 보였다. 두 사람이 실제로 결혼을 하기는 한 것일까? 믿어지지 않았다.
친가와 외가 어른들 중 부모님의 결혼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특히 친할머니는 아버지의 사주팔자를 근거로, 외할머니는 학력차를 근거로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그러나 그 시절 여자들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외할머니는 첫 단추가 잘못 꿰어져 모든 것이 비틀어졌다고 말하곤 하였다.
70대의 증조부는 종손을 보고 싶은 욕심에, 아버지는 개인적인 욕심에 결혼을 서둘렀다. 마른 대추처럼 쪼글쪼글한 얼굴에 검붉은 피부를 가진 증조부는 소원대로 종손을 볼 수 있었다. 증손자에게 집안의 기둥이 되라는 뜻을 지닌 ‘종구’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나는 아래채에서 지내시는 증조할아버지 밥상에서 밥을 먹었다. 두 살 위의 막내고모와 함께 네모진 밥상 앞에 무릎을 꿇고서 얌전하게 숟가락질을 하였다. 나는 한 집안의 가족원으로 입장을 한 것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내가 다섯 살 무렵이었을 때 화장실에서 쓰러진 뒤 돌아가셨다.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업어다 아랫방에 눕히던 모습이 선하다.
나의 이름은 종손에 어울렸다. 하지만 종갓집 큰며느리였던 어머니와 종손인 나는 아버지와 조부모의 충분한 보살핌을 받지 못하였다. 버림받았다는 말이 더 적절할 것이다. 어머니는 네 아들을 낳았지만 셋이 죽고 나만 살아남았다. 어머니 역시 하늘이 준 명(命)을 다 못 사시고 병들어 돌아가셨다. 한때는 종구라는 이름이 허망하였다. 모순으로 느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친족 어른들을 미워하였다. 하지만 속 감정을 드러낼 수 없었다. 도리어 집안 어른들이 내 속마음을 알게 될까 봐 조심스러웠다. 어리고 혼자 살 수 없었던 나는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의 보호를 받고 살아야 할 처지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6개월이 지난 뒤, 법성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환갑잔치가 열렸다. 잔치 전날, 마당은 음식 준비로 시끌벅적하였다. 친인척과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돼지를 잡고 떡을 하였다. 남정네들이 몰려들어 커다란 흑돼지의 앞뒤 다리를 새끼줄로 묶었다. 돼지가 버둥거렸다. 돼지를 돼지우리에서 끄집어낸 뒤 대문 가까운 쪽 마당으로 끌어왔다. 집에서 키우던 돼지였다.
씩씩거리는 돼지를 죽이기에 좋은 위치에 놓았다. 한 사내가 큼직한 나무 메로 돼지 머리를 두들겨 팼다. ‘퍽’ 소리와 동시에 돼지가 ‘꽤 애액’ 소리를 질렀다. 꽥꽥 소리에 동네 아이들이 구경을 위해 몰려들었다. 네다섯 번의 메질에 돼지의 저항이 약해졌다. 숨이 잦아들자 한 사내가 커다란 식칼로 돼지의 목을 갈랐다. 검붉은 피가 콸콸 쏟아졌다. 사내들이 붉은 피를 큰 양동이에 받았다. 일부 남자 어른들은 생피를 양은 대접으로 떠서 마신 뒤 소금을 집어먹었다.
다른 쪽에서는 커다란 떡메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떡쌀을 쳤다. 아이들이 빙 둘러서서 구경을 하였다. 사내의 굵은 손에 의해 큼직한 떡메가 하늘로 솟구치는 순간, 하얀 수건으로 머리를 동여맨 아주머니가 떡메에 밀려 주변부로 물러난 떡을 가운데로 밀어 넣었다. 다음 순간 하늘로 올라갔던 원통형의 떡메가 가속도를 붙이며 떡의 중심부를 향해 떨어졌다. ‘쿵’ 소리가 났다. 떡메와 아주머니의 손이 아슬아슬하게 비껴나갈 때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오그라들고 땀이 났다.
하얀 한복차림의 할아버지는 옆구리에 타원형의 갈색 안경집을 매고 뒷짐을 진 채 돌아다니면서 일마다 참견을 하였다. 부엌과 우물가에서는 전을 부치고 음식을 만드느라 떠들썩하였다. 일하는 엄마를 따라온 아이들은 먹거리를 찾아 눈을 두리번거렸다. 어른들이 주는 전을 얻어먹은 아이들의 입술이 번들거렸다.
해가 진 뒤 어스름 속에 다른 지역에서 군인으로 살던 아버지가 계모와 이복동생들을 데리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모두 일손을 멈추고 장남인 아버지 일행을 환대하였다.
그때 갑자기 왜 그랬을까? 엄마가 생각났을까? 그 순간에 대한 기억이 없다. 가슴에서 눈물이 솟구쳤다. 모를 일이었다. 온몸을 떨면서 주체할 수 없이 엉엉 울었다. 기둥에 얼굴을 기댄 채 울고 있는 나를 큰고모가 서둘러 부엌 구석으로 데리고 갔다.
“그만 울어라, 그만 울어. 네 아비 나쁜 놈이다. 네 아비 나쁜 놈이여. 이제 그만 울어라.”
큰고모가 함께 울면서 나를 달랬다. 내가 울다가 끅끅 대며 숨을 잘 못 쉬자 고모가 손으로 등을 탁탁 쳐주었다.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손으로 치마로 닦아 주었다.
이튿날 7월의 뜨거운 태양을 가리기 위해 사내들이 마당 여기저기에 차일을 쳤다. 그 아래서 사람들이 술과 음식을 먹었다. 누군가 노래를 불렀고 흥이 오른 사람들이 춤을 추었다. 대학생이던 막내 삼촌의 친구 한 명이 한복으로 곱게 여장을 하고 교태를 부리면서 춤을 추었다. 아주머니들의 자지러진 웃음이 잔치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그런 와중에 나는 아랫채의 마루 한구석에 멀거니 앉아 있었다. 나는 그저 싫었다. 어른들도 친척도 집도 모두 싫었다. 하지만 갈 곳이 없었다. 내가 싫어하는 그들이 나를 재워 주었고 입혀 주었고 먹을 것을 주었다. 밉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였다. 모순된 감정을 추스리기 힘들었다. 그저 떠나고만 싶었다.
비록 열세 살 소년이었지만, 나는 오래도록 가면을 쓰고 배신의 마음을 품은 채 살아야 하는 현실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내 감정에 정직하고 진실하게 살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하였다. 사진관에서 온 사진사가 기념 촬영을 하였다. 까까머리의 나는 다른 손자들과 함께 맨 앞줄에 얌전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 할아버지 할머니 환갑 기념사진을 찍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
이름을 주는 이유는
남과 구별하기 위해서다.
이름에는 더 깊은 뜻이 숨어 있다.
그가 고유한 존재라는 뜻이.
대개 이름에 붙은 역할에 묶여 산다.
자신의 고유성을 찾지 못한다.
역할은 알기 쉽지만
자신을 찾는 일은 힘들다.
‘참나’를 찾으려 할 때
종종 세상과 다투게 된다.
세상의 ‘그들’이 요구하는 통념과
맞서 싸울 용기가 필요하다.
‘참나’는 ‘그들’로부터
다투어 빼앗아 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