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아이의 행복을 위하여
학습은 인간의 본능이다. 교육은 인간의 숙명이다. 아이는 배우려고 한다. 어른은 가르쳐야 한다. 배우고 가르침을 받으면서 아이는 사람이 된다.
양육방식은 부모가 결정한다. 학습내용과 교육방식은 대개 교육자가 결정한다. 모든 인간은 배운다. 그중에서도 아이는 배우려는 열망이 충만한 존재다. 아이는 놀이 형식으로 배우기를 좋아한다. 아이마다 선호하는 학습내용과 교육방식은 다를 수 있다. 아이의 개별성을 고려하여 내용과 방식을 선정하여야 한다. 어른들의 아이에 대한 이해 수준과 안목은 중요하다.
지난 1월에 돌이었던 손자를 어린이집에 보낼 계획이다. 생후 13개월이 막 지난 상황이어서 조금 이른 편이다. 몇 달 동안은 엄마와 함께 가서 적응훈련을 하게 된다. 어린이집은 아이에게 새롭고 낯선 사회다. 거기에서는 자기 또래의 다른 아이들을 만난다. 엄마 아빠가 아닌 다른 어른과 소통하여야 한다. 어린이집 선생님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아이의 마음을 잘 공감해 주고, 아이의 필요에 즉각 반응해 주는, 따뜻한 선생님들이었으면 좋겠다. 또래 아이들은 어떤 아이들일까? 잘 웃고 유순하며 건강한 아이들이었으면 좋겠다.
돌이 막 지난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는 일은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구석기시대를 상상해 보라.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서 스스로 엄마 품에서 벗어나려 할 때 집밖으로 내보내는 것이 좀 더 자연스럽지 않겠는가? 그러나 2025년 현재 한국사회는 아이의 그런 욕구를 온전하게 받아주지 못한다. 육아휴직이 끝난 엄마는 일터로 가야 한다. 현실이 그러하기에 때 이르게 아이를 엄마 품에서 떼어내서 어린이집이라는 낯선 곳으로 강제로 보낸다.
돌이켜보면 40년 전 아내는 두 달간의 출산휴가를 끝내고 곧바로 학교로 복귀했었다. 그때에 비하면 이런 강요는 많이 개선된 것이다. 지금은 아이의 애착형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높아졌고, 보육의 국가책임도 인정하게 되었으며, 국가의 경제적 여건도 좋아졌기 때문이다.
아이는 어린이집에 가면서 한국식 보육제도와 교육체계에 진입한다. 아이는 미국이나 케냐가 아닌 한국식 보육제도의 영향을 받는다. 한국식 보육제도는 아이에게 ‘주어진’ 것이다. 아이가 자율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다. 나는 아이에게 강요된 이 제도가 아이의 정서발달을 돕기를, 학습의욕을 고취시켜 주기를, 성장열망을 키워주기를 기대한다. 어린이집에서의 하루가 즐겁기를 희망한다. 아이가 상처받는 일이 없기를 간절하게 소망한다.
한국은 사교육에 많은 비용을 지불한다. 극단적인 대학입시경쟁으로 몸살을 앓는다. 중국이나 일본도 우리와 사정이 비슷하지만 과도한 경쟁과 폭력적인 학교문화로 인한 학생들의 불행감은 한국이 유독 더 심하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두드러진 이유는 경제사회적 양극화가 심하고, 직업 간 직종 간 급여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가 한국식 교육제도 아래서 혹독한 경쟁에 시달릴 것을 염려한다.
어떤 때는 한국이 아이들과 청소년들이 행복하게 생활한다는 핀란드나 덴마크처럼 변하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단기간에 한국이 그런 나라처럼 변하기는 힘들 것 같다. 때로는 그런 나라에 가서 아이를 키우는 것을 상상해 본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런 상상은 말 그대로 어디까지나 상상일 뿐이다. 아이는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대안학교도 고려해 본다. 주변에서 대안학교를 보냈던 사람들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가만히 듣다 보면 선뜻 선택하기가 쉽지 않다. 대안학교도 한국식 교육체계 안의 대안학교이기 때문이다. 대안학교의 환경도 북유럽의 교육환경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 교육문화의 문제점을 해결하려고 노력하였다. 여러 차례 대학 입시 제도를 개선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뚜렷한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객관식 정답 고르기로 대학생을 선발하는 시대착오적인 방식을 바꾸지 못하였다. 입시지옥을 없애지 못했다. 학부모들은 자녀들이 입시지옥에서 무사하게 빠져나오기를 기도할 뿐이었다. 왜 그랬을까?
입시지옥만 통과하면 모든 것이 끝일까? 아니다. 입시지옥을 빠져나오면 취업난이 기다리고 있다. 다수의 청년들은 미래를 그늘진 눈으로 바라본다. 통과해야 할 터널이 어두워 보인다. 쉽게 끝날 것 같지 않다. 연애와 결혼과 출산을 포기한다. 청년들의 기본정서는 불안과 분노다. 이런 고통을 왜 없앨 수 없는 것일까? 왜 그럴까? 현재 한국 청년들이 겪는 어려움을 지금 우리 아이도 그대로 겪는 것은 아닐까?
한국의 교육제도와 교육풍토는 분배구조와 복지체계 정치사회문화를 그대로 반영한다. 학교는 한국사회의 일부이자 사회 재생산체계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여러 유형의 사회집단이 머리를 맞대고 좀 더 행복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대의(大義)에 합의하지 않는 한, 현재의 상황은 지속된 것이다. 시대는 빠르게 변하지만 사회구조는 완고(頑固)하다.
비록 개선이 힘든 현실이지만 나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아이의 행복한 성장과 나의 행복은 별개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아이의 친구들도 행복해야 한다. 혼자서는 행복할 수 없다. 아이와 아이의 친구들과 나의 행복을 위하여 나는 세상사를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눈을 부릅뜨고 지켜볼 것이다. 필요하면 변화에 참여할 것이다.
나는 조세제도와 분배구조의 개선을 통하여 양극화를 해소하려고 노력하는 정당을 지지할 것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급여차이를 줄이거나 없애려고 노력하는 정치가를 응원할 것이다. 공교육의 질을 높여 사교육의 비중을 줄이려는 정책을 환영할 것이다. 나의 이런 바람을 실현시키려고 노력하는 시민단체를 후원할 것이다. 나의 이런 기대와 어긋나는 정당과 정치가를 비판하고 거부할 것이다. 나의 이런 관심과 참여가 한국에서 자라는 아이들의 행복한 미래를 위한 한 톨의 밀알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