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눈은 게으르다
“할머니! 언제 이걸 다 해요? 밭이 너무 커요.”
“눈은 게으르단다. 하다 보면 다 한다.”
두둑에 고구마순을 꽂아 넣으면서 언제 끝날지 모를 밭일이 걱정스러워 시름 섞인 말투로 묻자 할머니가 나를 타일렀다. 서서 보면 밭은 만만한 크기로 보인다.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한걸음에 이를 것 같다. 그러나 작업을 위해 앉은 자세를 취하고 밭의 반대편을 건너다보면 그 끝은 아득한 지평선이 된다. 그저 빨리 일을 마치고 놀고 싶기만 한 10살 소년이었던 나는 누군가가 요술을 부려 고구마 밭을 줄여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날 밭에 고구마순을 심는 일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또 어느 때쯤 끝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눈은 게으르다’는 할머니의 말은 내면에 각인(刻印)되었다.
일하는 것보다는 노는 것이 더 즐겁다. 대개 사람들은 어떻게든 일하는 시간을 줄이고 노는 시간을 늘리려고 기를 쓴다. 어쩔 수 없이 해야 할 일이라면 어떻게 빨리 끝낼 것인가를 궁리한다. 단조롭게 반복하는 일은 재미도 없다. 일하는 도중에 몸을 배배 꼬기도 하고, 온갖 요령을 부려 따분한 감정을 추스르려고 애를 쓰게 된다.
일이 너무 힘들면 자기기만을 통하여 일이 곧 놀이라고 믿으려고도 한다. 급기야 자기기만에 성공한 사람은 일중독에 빠진다. 일중독도 일종의 중독이고 병이다. 일중독에 빠진 사람은 인간관계가 무너지고 생산성이 떨어지며 삶도 피폐(疲弊)해진다. 치료를 받아야 한다.
이와 달리 억세게 운이 좋은 사람도 있다. 어떤 주제를 가지고 노는 것이 좋아 그 놀이를 즐겼는데, 그 취미생활 덕분에 돈벌이까지 하게 되었다면? 당연히 그는 만인의 부러움을 받는다. 그에게는 노는 것이 일하는 것이고, 일하는 것이 노는 것이다. 수많은 여성들에 둘러싸여 살면서 자기가 그리고 싶은 에로틱한 작품을 마구 그려대고 경제적으로도 풍족하였던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는 그런 행운을 누린 사나이다. 이런 경우는 아주 예외적이다. 특별한 재능을 선물로 받지 못한 나와 같은 사람은 그런 사람을 아예 쳐다보지 않는 것이 정신건강에 유리하다.
나는 범속(凡俗)한 사람이어서 단조롭게 반복하는 지루한 일을 피하지 못하고 산다. 쪽파를 다듬는 일은 그런 일 중의 하나다. 쪽파는 아내나 나나 아주 좋아하는 채소다. 쪽파로 쪽파김치 쪽파무침 쪽파전을 만든다. 배추김치와 김칫국을 만들 때도 쪽파를 사용한다. 어묵국이나 된장국에는 잘게 송송 썬 쪽파조각을 집어넣는다. 문제는 야채가게에서 사 온 쪽파를 다듬는 일이다. 가성비(價性比)가 좋아 어쩔 수 없이 사게 되는 큰 쪽파 단은 살 때부터 근심거리다.
먼저 뿌리 쪽의 흙을 대충 털어낸다. 다음에는 개수대에 쏟아놓고 애벌로 씻는다. 쪽파의 틈새를 벌리고 쪼개면서 쪽파 사이사이에 끼어있는 흙을 씻는다. 얼추 씻은 쪽파를 손질하기 위해 큰 쟁반에 차곡차곡 쌓아놓으면 넉넉함과 걱정이 동시에 밀려온다. ‘많구나. 조금만 살 걸. 언제 이걸 다 하지?’ 일은 이미 벌어졌는데 후회를 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엎질러진 물. 이럴 때 나는 할머니가 가르쳐주신 주문을 외운다.
‘눈은 게으르다. 하다 보면 다 한다.’
파의 자극에 약한 나는 눈물을 흘리고 콧물을 훌쩍이면서 쪽파를 손질해 간다.
‘눈은 게으르지. 그래그래.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다듬기만 하자. 언젠가는 끝나겠지.’
할머니의 주문은 효과가 있고, 쪽파 손질은 때가 되면 언제나 끝난다. 쪽파를 손질할 때만 할머니의 지혜가 담긴 주문을 활용하는 것은 아니다. 가래떡을 어슷썰기 하여 떡국 떡을 만들 때는 ‘눈은 게으르다. 썰다 보면 다 썬다.’고 속말을 한다. 산행(山行)을 할 때 눈앞에 예기치 않았던 언덕이 나타나면 ‘눈은 게으르다. 가다 보면 넘는다.’고 혼잣말을 한다.
‘눈은 게으르다’는 말은 무엇을 경계(警戒)하는 말일까? 눈으로 어떤 사태를 보면, 그 순간 마음은 잔머리를 굴리고 쓸데없는 요령을 부리려 한다. 구체적인 실행을 회피하려 한다. 그런 마음은 행동을 더디게 하고 불만족스러운 결과를 낳는다. 회피하지 않고 진솔하게 사태에 직면하는 것이, 게으른 마음을 버리고 과제에 집중하는 것이, 도리어 마음을 평안하게 하고 좋은 결과를 얻게 한다. ‘가다 보면 가게 된다.’는 말과 ‘눈은 게으르다.’는 말은 일맥상통(一脈相通)한다.
할머니는 농경사회에서 흙과 씨름하며 살았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끝없이 밀려드는 일감을 우공이산(愚公移山)의 마음 자세로 감당했을 것이다. 수행자(修行者)가 마음을 호흡에 집중하여 번뇌를 밀어내듯, 할머니는 마음을 손놀림에 집중하여 지루하고 단조로운 땡볕 속의 하루를 견뎌냈을 것이다.
삶은 버티고 견디는 것이다. 나는 종종 할머니가 유산(遺産)으로 물려주신 주문을 외우며 일을 한다. 일에 따라 필요하면 변주(變奏)도 한다. 게을러지려는 마음을 달랜다. 힘든 일이어도 쉽게 물러서지 않는다. 당당하게 맞닥뜨린다. 맘속 깊은 곳에서 할머니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눈은 게으르단다. 하다 보면 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