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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길에서

50. 약한 사람 먼저

by 걍보리

몸에서 마음이 쓰이는 곳은 아픈 곳이다. 가족 중에서 마음에 걸리는 사람은 병들거나 어려운 사람이다. 어떤 무리에서 우선적으로 관심을 받아야 할 사람은 뒤처진 사람이다. 국민 중에서 먼저 배려받아야 할 사람은 사회적 약자이다.

관심의 폭이 전체인류와 일체생명으로 넓혀진 사람은 난민(難民)이나 병든 동식물에도 관심을 갖는다. 고통 앞에서 중립은 없다. 고통받는 존재를 향한 연민은 보통사람이 갖는 마음(人之常情)이다. 괴롭히는 사람과 괴로워하는 사람 중 나는 어떤 사람 곁에 서야 하는가?

자신의 몸에 대한 관심은 본능이다. 그러나 자신의 몸을 넘어서 가족, 소속 집단, 국민으로 인식의 영역이 확장되면 거기에 어울리는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다. 안타깝게도 세상에는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거나, 받은 교육내용을 잊은 자들이 있다. 그들은 곰이나 호랑이의 얼굴을 벗고 사람의 얼굴을 갖추는데 실패했거나, 사람이 되는 것을 포기한 자들이다.

때로 내가 사는 이 땅에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것은 몹시 불쾌한 일이다. 아픈 마음을 추스르며 단식투쟁을 하는 세월호 유족들 앞에서 먹방을 한 자들은 사람이 아닌 짐승의 마음을 가진 자들이었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능력을 못 갖춘 짐승 같은 자들이었다. 역겨웠다. 그런데 그들과 비슷한 인간들이 이야깃거리가 되고 뉴스가 되어 온갖 매체를 가득 채운다. 그런 짓이 돈벌이가 된다니, 놀랍고 어이가 없다. 아마 그들도 몸이 아프면 병원을 찾아갈 것이다.

어떤 사회가 살만한 사회인지 아닌지 여부를 가늠하는 기준에는 약자에 대한 배려의 정도가 있다. 건강한 사회라면 사고나 재난이 발생할 경우 어린이, 노약자, 임산부, 젊은 여성을 먼저 구제하고 젊은 남성을 나중에 구제할 것이다. 그 까닭은 상대적으로 젊은 남성이 스스로를 구제할 능력이 더 크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약자에 대한 우선적인 배려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발달시켜 온 오래된 능력이다.

약자에 대한 배려는 매우 인간적인 태도다. 대개의 동물은 골절되면 오래 살지 못한다. 그런데 초기 인류의 유골 중에는 골절된 후에도 오래도록 살다가 죽은 것으로 밝혀진 유골이 있다. 부상당한 사람이 오래도록 돌봄을 받았다는 증거다. 현재의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자기보다 더 크고 힘이 센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나 호모 에르가스터와의 경쟁에서 살아남았던 주요한 이유를 협동성에서 찾는 학자도 있다. 약자를 돌보는 마음이 없으면 협동도 있을 수 없다.

아기를 보살피는 까닭은 아기가 약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오늘은 강건한 자일지라도 내일은 돌봄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약자에 대한 배려는 내일의 자신의 안전을 위한 심리적 실질적 보험이기도 하다. 약자를 돌보는 집단과 약자를 내팽개치는 집단 중 어느 집단의 생존가능성이 더 높을까? 당연히 전자다.

약자를 혐오하는 자들은 혐오스럽다. 힘을 숭상하고 권력에 취한 트럼프에게서 나는 백인우월주의와 인종주의를 본다. 그는 약소국을 장난감처럼 다룬다. 트럼프와 같은 권력지향적인 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갈등 조장과 폭력을 마다하지 않는다. 화합과 연대의 언어가 아닌 갈라치기 언어를 즐긴다. 그것을 통해 약자를 차별하고 배척한다. 차별과 배척은 증오를 낳는다. 전쟁과 테러, 폭동 뒤에는 차별에 대한 저항과 증오가 도사리고 있다.

우리 사회의 기본 정서인 불안(不安)의 뿌리는 무엇일까?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의 부족이다. 사회적 약자란 신체적 문화적 인지적 특징으로 인해 사회의 주류 집단 구성원으로부터 명시적이거나 암묵적으로 차별받으며, 스스로도 차별받는 집단에 속해 있다는 의식을 가진 사람들을 말한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약자는 장애인, 외국인 노동자, 결혼이주여성, 다문화 청소년, 탈북민, 동성애자 등이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과도한 경쟁사회에서 탈락한 사람은 약자 중의 약자다. 학교나 직장에서 약자는 괴롭다.

철학자 존 롤스(John Rawls)는 약자들을 우선적으로 배려해야 정의로운 사회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이라는 사고실험(思考實驗)을 통하여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의 혜택을 주어야 한다.’는 명제를 이끌어냈다.

존 롤스는 개인들이 자기 이익이나 특정 집단에 대한 편견의 영향을 받지 않고, 공정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 ‘무지의 베일’ 속에 있다는 상상을 해보자고 했다. 무지의 베일에 가려져 있으면 개인들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 능력, 선호도는 물론이고 사회 내 다른 개인들이 가진 지위, 능력, 선호도도 모른다. 이 상황은 사회계약이 이루어지기 전의 원초적 상태이며, 구성원들의 이해관계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정보들이 가려진 상황이다.

무지의 베일이라는 사고실험은, ‘자신이 사회에서 가장 약한 자의 위치에 있을 수 있다.’는 가정(假定)을 할 때, 당신은 사회적 약자에 대하여 어떤 결정을 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사회적 약자라면, 배고프고 춥고 아프다면, 우선적으로 보호받기를 원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는 사회적으로 가장 약한 자에게 자원을 우선 배분하는 것을 정의사회 구현의 첫걸음으로 보았다.

한국사회의 약자인 장애인을 생각해 보자. 한국사회 대부분의 장애인은 후천적인 사고로 인한 것이다. 누구든지 장애인이 될 수 있다. 장애인의 이동권 존중을 요구하는 장애인들 역시 원래는 비장애인이었다. 존 롤스의 입장에서 보면, 비장애인이 언제든지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서 장애인을 배려하는 정책을 펴는 것이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길이다. 다른 유형의 약자를 돌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다양한 유형의 약자를 보듬지 못하는 사회는 병든 사회다. 잔인하고 무서운 사회다.

한 가정 안에서도 먼저 돌보아야 할 사람은 가장 약한 사람이다. 약한 사람을 돌보지 않으면 구성원들의 화합은 깨진다. 가족원 사이에 갈등과 미움이 생긴다. 인정(人情)이 메마른 가정은 병든 가정이다. 병든 가정을 치유하는 길은 가족 중에서 가장 약한 사람을 돌보는 것이다. 건강한 가정을 이루고 싶으면 가족 중에서 누가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지 살펴야 한다.

장남을 중시하는 가부장제나 남존여비 전통문화는 차별과 증오를 낳았다. 가족관계를 병들게 했다. 지금도 그런 차별의 악습을 벗지 못하고 시대착오적인 생각에 젖어 사는 사람들이 있다. 가족원 중에서 아들에게 그것도 장남에게 더 많은 자산을 상속해 주려는 사람이나, 그걸 원하는 사람이 바로 그런 악습에 빠진 사람이다. 미움은 전염된다. 소외된 딸이나 차별받은 아들의 마음이 병들면 남은 가족도 병이 든다. 차별하는 사람과 차별받은 사람이 어떻게 한 가족일 수 있겠는가? 형제보다 돈을 더 중시하는데 어떻게 형제애가 유지될 수 있겠는가?

개나 원숭이도 차별과 불공정에 분노한다. 대부분의 차별로 인한 고통은 약자에게 집중된다. 차별로 상처받은 자녀에게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하는 것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나는 우리 가족과 친인척들에게서 형제자매 간의 불화(不和)를 보았다. 대개 불화의 원인은 불공정과 차별이었다. 차별로 우는 아이에게 우정(友情)을 말하는 것은 얼마나 큰 모순인가? 불공정으로 신음하는 사람에게 정의를 말하는 것은 얼마나 큰 위선인가?

이기적 유전자는 전략적인 이타적 행위를 통해 생존하고 번성할 수 있었다. 몸은 아픈 곳을 치료함으로써 온몸의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차별받는 가족원이 없을 때 가족은 화목(和睦)할 수 있다. 고통받는 사람을 배려하는 정책을 펼 때 사회는 건강해질 수 있다. 나는 자유롭고 화목하고 건강한 세상에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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