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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길에서

54. 아들과 손자

by 걍보리

친구 1 “인연을 완전히 끊고 싶어.”

친구 2 “많이 섭섭했었군.”

친구 1 “오죽했으면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겠어? 아들이 아비를 아비로 보지 않으니, 나도 그놈을 자식으로 보지 않으려고 해.”

친구 2 “그래도 결혼식장에서는 혼주석에 앉지 않았나?”

친구 1 “나한테 상의도 제대로 안 하고, 저희들끼리 모든 걸 다 정해놓고. 차마 혼주석을 비워둘 수는 없어 나를 들러리 세운 거지. 그걸 뻔히 알면서도 간 거야. 바보같이.”

친구 2 “들러리 세우는 것처럼 느꼈다고? ‘야, 너희들 맘대로 해. 나를 부르지 마.’ 그렇게 말하지 그랬어. 또 아예 안 갔어야지. 결혼식장에 가기는 왜 가. 이렇게 화를 낼 거면 왜 갔냐고?”

친구 1 “그래도 그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지 않아? 분노를 꾹 참고 갔지. 몇 년 동안 연락도 안 하던 놈이 불쑥 나타나서 ‘아버지, 저 결혼하니까 식장에는 꼭 와 주세요.’라니. 허 참 기가 차서. 자식 같지도 않아.”

친구 2 “자네 말이 옳네. 자네 아들 정말 나쁜 놈이네. 아버지를 그렇게 들러리 취급하다니. 자네는 옳고 아들은 틀린 것 같네. 아버지를 바보처럼 대하는 자네 아들 참 나쁜 놈이네. 그나저나 오랜만에 만난 자네 아내는 어땠어?”

친구 1 “모자(母子)가 한 패야. 식장에서는 나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인사를 시키더라고. 다정한 부부인 것처럼 쇼를 한 거지. 에이 나쁜 년.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나를 아주 모르는 사람 취급하더군. 나를 갖고 논 거지. 나 혼자 힘들게 산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어떻게 사는지 아예 묻지도 않아. 한 이불속에서 살을 맞대고 살았었던 여자라는 게 도저히 믿어지질 않을 정도야. 차라리 내가 남이었으면 그렇게까지 쌀쌀맞게 굴진 않았을 거야. 나를, 남편을 사람으로 보지 않으니 그렇게 차가운 것이 아니겠어? 정말 원수가 따로 없다니까.”

친구 2 “자네 말이 옳네. 정말 자네 아내도 문제가 많네. 남편을 그렇게 대하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어? 화가 나는 게 당연하네. 그나저나 자네 아들 결혼한 지도 벌써 몇 년이 지나지 않았나? 인연이 끊겼다면 벌써 끊겼을 것 같은데, 오늘은 또 무슨 일이야?”

친구 1 “작년에 며느리가 임신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어. 아들이라더군. 3년 만에 아이가 생겼다니까 다행이라고 생각했지. 옥편(玉篇)을 뒤져가면서 이름을 지어 보지 않았겠어. 항렬(行列)에 맞추어 예쁜 이름을 지으려니까 쉽지 않더라고. 그래도 몇 달 동안 궁리에 궁리를 다 해서 이름을 몇 개 지어 보았지. 그런데 며칠 전에 아들놈이 갑자기 이름 여섯 개를 내게 보냈어. 다짜고짜 마음에 드는 이름을 골라보라는 거야.”

친구 2 “아들이 아버지에게 아이 이름을 상의하는 걸 보니, 자네가 인연을 끊을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친구 1 “손자 이름을 지으려면 할아버지인 내 뜻을 먼저 물어야 하지 않아? 그게 사람이지. 어떻게 된 게 단 한 번도 상의를 하지 않는단 말이야. 대신에 작명소에 가서 비싼 돈 주고 이름을 지어놓고, 나 보고 좋은 걸 고르라니. 그런 법이 어디 있어? 내가 아비처럼 안 보이니까 그러는 거지. 게다가 내 의견을 제대로 들어보지도 않고 벌써 이름을 정했다지 뭐야. 그놈에게 이 아비는 언제나 들러리 이상도 이하도 아닌 거지. 이러니 내가 인연을 끊으려고 하는 거야.”

친구 2 “자네가 화내는 게 이해가 되네. 자네 말이 옳아. 어떻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그럴 수 있지? 손자 이름을 지으려면 작명소가 아닌 장차 할아버지가 될 사람에게 먼저 물어야 하지 않아? 자네 아들 정말 나쁜 놈이네.”

친구 1 “그래서 내가 아들에게 이 말을 하려고 해. 앞으로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나도 너를 아들로 대하지 않을 거다. 그러니 연락도 하지 마라. 이렇게 말이야.”

친구 2 “자네가 말하는 내용으로 보자면, 자네가 역시 옳은 것 같아. 정말 못 돼먹은 아들인 것 같아. 그런데 말이야. 자네와 자네 아들 사이는 그렇다 치고. 궁금한 게 있어.”

친구 1 “뭐가 궁금한데?”

친구 2 “자네 손자가 자네에게 잘못한 것이 있는가?”

친구 1 “아니. 그런 것 없어. 애가 무슨 잘못을 하겠어?”

친구 2 “다행이군. 할아버지와 아버지 사이가 나쁘면, 반드시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도 나빠야 한다는 법은 없지.”

친구 1 “아들은 아들이고, 손자는 손자지.”

친구 2 “나도 자네 말에 동의하네. 아들과 사이가 나쁘다고 해서 반드시 손자와도 사이가 나빠야 하는 건 아니니까 말이야.”

친구 1 “그렇지. 나는 손자에게 무얼 선물해 줄까 생각도 해 보았다네.”

친구 2 “아들은 그렇게 미워하면서 거참. 손자 이름을 지어보고, 무슨 선물을 해 줄까 고민하다니. 자네 마음은 이미 따뜻한 할아버지네 그려.”

친구 1 “내가 따뜻한 할아버지라고? 아들과 인연을 끊으려고 했는데, 자네 말을 듣다 보니 갑자기 내 맘이 복잡해지는데.”

친구 2 “아들과의 인연은 아들과의 인연이고, 손자와의 인연은 손자와의 인연이지. 손자에게도 할아버지가 없는 아이가 되는 것보다는 따뜻한 할아버지가 있는 아이가 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친구 1 “맘이 마구마구 뒤엉키는 것 같아.”

친구 2 “뒤엉킬 것 없네. 복잡할 것도 없어. 내 생각에 자네는 확실히 옳아. 그 못된 아들놈하고는 멀리 해도 좋을 것 같네. 대신에 아무 잘못이 없는 손자 하고는 친하게 지내도 좋을 것 같아. 자네 마음이 가는 그대로 다정하게. 사진도 함께 찍고. 간단하잖아?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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