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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길에서

53. 손자는 왜 예쁠까?

by 걍보리

오른발과 왼발을 조심스럽게 번갈아 딛던 손자가 어느 순간 아장아장 걸었다. 아내와 나는 동시에 ‘우와’ 탄성을 지르고 박수를 치면서 그 모습을 황홀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마치 걷는 사람을 처음 본 것처럼. 몇 걸음 걷다가 넘어진 아이를 안아 일으킨 아내는 아이를 꼬옥 껴안았다. ‘우리 강아지 우리 강아지’ 하면서 아이의 볼에 자기의 볼을 격렬하게 비벼댔다. 곁에 있던 딸이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그렇게 예뻐?”

“너 키울 때는 이렇게 예쁜 줄 몰랐어. 그런데 손자는 정말 예뻐.”

“손자는 왜 그리 예쁠까?”

“그럴듯한 여러 가지 이유가 있더라. 어쨌든 그냥 예뻐.”

조부모의 손자에 대한 각별한 애정은 인류의 보편적 현상이다. 이 현상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을 위하여 여러 학자들이 가설을 세우고 연구를 하였다. 그중 하나가 할머니 가설(grandmother hypothesis)이다. 진화생물학(evolutionary biology)의 관점에서 만들어진 할머니 가설은 비교적 탄탄한 근거를 축적하고 있다.

고릴라 침팬지 등 대개의 유인원은 번식기가 끝나면 수명도 끝난다. 반면에 인간 여성은 폐경 후에도 수십 년을 더 산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일정 시점에 이른 여성은 직접 자녀를 낳는 것보다 손자들의 양육에 도움을 줄 때 자신의 유전자를 더 번성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은 아이가 그렇지 않은 아이에 비해 정서적으로 더 안정되고 인지능력이나 사회성도 좋다. 위기 상황에서 생존율도 더 높다. X염색체를 기준으로 친할머니와 손녀는 50% 유전자를 공유하고, 외할머니와 손자 손녀는 25% 유전자를 공유한다.

기능성 자기 공명영상(fMRI)을 이용한 연구도 있었다. 할머니들이 손자의 사진을 볼 때는 정서적 공감과 관련된 뇌 영역이 활성화된 반면에, 자녀(아들, 딸)의 사진을 볼 때는 인지적 공감과 관련된 뇌 영역이 더 활성화됐다. 부모는 책임감을 가지고 자녀를 대하면서 힘들어 하지만, 조부모는 사랑으로 손자를 대하면서 큰 만족감을 느낀다는 일반상식을 뒷받침하는 연구결과다. 대체로 조부모는 손자들에게 너그럽다.

그 외에도 조부모가 부모에 비해 시간 여유가 더 많아 편하게 아이를 돌볼 수 있다거나, 자신의 대(代)를 이을 아이라서 귀하게 보인다는 사회적 관점의 주장도 일정 부분 타당하다. 그러나 나는 손자를 돌보면서 진화생물학적 관점이나 사회적 관점과는 조금 다른 견해도 갖게 되었다.

나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우리 손자만 예쁜가?’ 내 답은 ‘아니다’였다. 내 유전자를 전혀 갖지 않은 아이들도 예뻐 보인다. 어떤 사람은 ‘그래도 자기 손자가 더 예쁘지 않으냐?’고 물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 하지만 생물학적 친근성 못지않게 잦은 접촉에 의한 이해의 정도도 영향이 크다고 생각한다. 더 알고 더 익숙하면 더 사랑스럽게 보이지 않겠는가? 내 손자이기에 더 잘 알고 더 익숙하게 되었을 것이고, 그렇기에 더 사랑스럽게 여기게 된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설령 내 손자가 아닌 다른 아이일지라도 나와 함께 지낼 기회가 더 많이 주어진다면 그 아이도 사랑스럽게 여겨지지 않을까? ‘낳은 정보다 기른 정이 더 크다’는 우리 속담이 있다. 진실이다. 영화 <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에서는 출생 때 부모가 뒤바뀐 아이들이 낳아준 부모가 아닌 길러준 부모의 품을 찾는다. 실제로 인간의 의식(意識)과 삶을 생물학으로만 설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인간은 사회문화적 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를 감동시킨 것은 아이 자체다. 아이가 태어나고 젖을 먹고 몸을 뒤집고 기는 모습을 보면 생명에 대한 경이감(驚異感)이 느껴진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것처럼, 아이는 부모를 통해 사람 몸을 받아 태어난다. 그 자체로 신비(神秘)다. 씨앗에서 싹이 나는 현상을 ‘유전학으로 해설하는 것’과 ‘경이감을 가지고 대하는 태도’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나는 손자의 탄생과 성장을 보면서 모든 인간의 탄생과 성장을 본다. 아이를 통하여 인간 한 명 한 명이 갖는 존엄성과 고유성을 본다. 온갖 생명의 고귀함을 본다.

노인은 삶과 생명의 유한성을 명확하게 체감한다. 유년기와 청년기가 짧고 아름답다는 것을 실감한다. 노인의 눈에는 아이와 꽃이 예뻐 보인다. 진실이다. 노인은 아이나 청년을 보면 ‘좋은 시절이다’를 입버릇처럼 말한다. 이미 가버린 청춘을 회상하면서 아쉬워한다. 순식간에 사라질 젊은 시절을 온전히 꽃피우지 못하는 청년을 보면 안타까워하고 슬퍼한다. 노인은 젊음을 부러워하지만, 젊은 사람은 젊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꽃이 꽃을 부러워하지 않는 것처럼.

조부모에게 아이는 피기 직전의 꽃망울이다. 아이를 보면 새싹을 보는 것 같다. 즐겁다. 아이의 순수성을 보면서 사람의 본디 그러함(自然)을 본다. 인간과 세상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다. 빠른 속도로 이것저것을 배우고 익히며 커가는 아이를 보면서 감탄한다. 놀랍고 흥미롭다. 아이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닫는다. 이것들은 나의 손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일까? 아니다. 세상의 모든 아이들에게 해당하는 것이다. 부모 품에 안겨 있거나 유모차를 타고 가는 아이를 보면 저절로 미소가 배어 나온다. 나를 즐겁게 하는 존재가 어디 아이뿐이랴. 세상의 모든 어린 것은 경이롭고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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