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일기(25. 4. 17)
아침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신 뒤 산책을 한다. 반쯤 남은 벚꽃이 바람에 흩날린다. 허공에 가득한 소리 없는 아우성. 꽃잎 하나가 이마를 스친다. 부드럽다. 벚꽃이 진 자리에 연두색 새순이 고개를 내민다. 겨우내 팽팽하였던 거리의 긴장도, 불면으로 굳었던 내 작은 몸도 봄날 햇볕에 느슨해진다. 사람들은 자기 갈 길을 가고 차들은 줄지어 도로를 달린다.
불행이 아니면 행복이고, 탈이 없으면 좋은 날이다. 고통이 없으면 그대로 니르바나다. 날마다 좋은 날일 수는 없으나 가끔은 좋은 날일 수 있다. 점점이 내려앉은 분홍 꽃잎이 길을 메운다. 검은 아스팔트가 벚꽃 잎으로 하얗다. 꽃잎이 발에 밟힌다. 꽃길이다.
지난 3월에는 시집간 조카가 아들을 낳았다. 거의 같은 시기에 동창 두 명이 저 세상으로 떠났다. 꽃이 피고 지듯 사람도 피고 진다. 나도 핀 지 제법 오래되었다. 머지않아 질 것이다. 때가 되면 벚꽃처럼 미련을 두지 않고 서둘러 떠날 것이다. 바람 속 벚꽃 잎처럼 소리 없이 사라질 것이다.
길을 걷다 발을 멈춘다. 눈부신 하얀 조팝꽃 무더기에서 향이 흘러넘친다. 조팝꽃 흰색에 몸을 맡긴다. 호흡을 길게 하여 꽃 향을 마신다. 봄이 건네준 선물을 달갑게 받는다. 오늘 같은 봄 하늘은 몽환적이다. 마음이 하늘로 붕붕 뜬다. 하늘에는 오묘한 힘이 있다. 푸른 하늘은 마음을 달래준다.
같은 길이지만 오늘 걷는 길은 며칠 전의 그 길이 아니다. 민둥머리 나무를 물들이던 연두색이 올리브 그린으로 바뀌었다. 그 색은 머지않아 연초록으로, 다음에는 진초록으로 바뀔 것이다. 봄날의 나무는 날마다 변한다. 벚꽃은 아침과 낮과 저녁이 다르다. 한 젊은 엄마가 자목련 그늘 아래로 유모차를 밀고 간다. 아이의 눈과 내 눈이 마주친다. 아이가 연노랑 어린 싹처럼 보인다.
어린 시절을 인생의 봄으로 비유하는 것은 옳다. 봄에는 새싹이 돋는다. 아이는 새싹과 같다. 노년기를 겨울로 보는 것도 그럴듯하다. 노인의 피부는 겨울날처럼 쉽게 마르고 차가워진다. 인생 겨울에 들어선 내가 이런 봄 길을 걷는 것은 행운이다. 아이를 보면서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엄마 등에 업혔던 순간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그래그래, 그 시절이 봄이었구나.
단단하고 야무진 겨울을 좋아하는 친구도 있지만 나는 여리고 따뜻한 봄을 더 좋아한다. 계절뿐만 아니다. 반듯한 사람도 좋지만 따뜻한 사람은 더 좋다. 따뜻한 마음은 선한 마음이다. 선한 마음은 아름답다. 선한 마음은 진리다. 자비와 사랑은 아름다운 진리다. 봄은 아름답다. 봄은 진리다. 오래도록 오늘 같은 봄 속에서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