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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길에서

55. 섬기는 삶

by 걍보리

나는 작고 약한 사람이다. 짧지 않은 세월을 지나면서 나 자신에 대하여 가장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나는 유한하고 무지몽매(無知蒙昧)한 존재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무력하고 무능하며 고통 앞에서 두려워하고 벌벌 떠는 존재라는 것이다. 다행히 나는 내가 나약하고 초라한 존재라는 것을, 남 앞에서 뻣뻣해질 목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어려서는 나의 가능성과 한계를 가늠할 수 없었다. 일상생활에서 어떤 일이 뜻대로 되지 않거나 벽에 부딪힐 때에야 비로소 무능(無能)을 깨닫고 무력감(無力感)을 느꼈다. 오래도록 무능의 이유가 나이에 있다고 생각했다. 어른이 되면 저절로 유능해질 것이라고 믿었다. 빨리 자라서 힘이 센 어른이 되고 싶었다. 조금 자라자 마음 씀씀이가 어린아이만도 못한 어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어른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청소년기에 접어들면서 어른들 역시 기대한 만큼 유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인간이란 존재가 본디 불완전할 뿐만 아니라, 선악을 동시에 지닌 모순덩어리란 걸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언제였는지 확실하진 않지만 과자를 얻어먹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또래들을 따라서 교회에 갔었다. 하늘나라에는 하느님이 있는데, 그 하느님이 사람들을 구하려고 자기 아들을 땅으로 보냈다는 이야기에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그러면서도 무엇이든 다 알고 있고,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주장에 호기심을 가졌다. 만약에 그런 절대적인 능력을 가진 존재를 가까이하면 내게도 그런 힘이 생길까? 하늘을 날아다니고 악당을 단숨에 제압하는 능력자가 될 수 있을까?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와 같은 ‘전지전능(全知全能)에 대한 유아(幼兒)적 소망’의 어리석음을 머리로 안 것은 청소년기였지만, 가슴으로 인정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열심히 살면 새로운 세상에서 살 것이라는 희망을 오래도록 내려놓지 못했다. 기도하고 수행을 하면 혼돈(混沌)의 인간 세상을 벗어날지도 모른다는 꿈을 버리지 못했다.

나는 사람 몸을 받아 사람으로 태어났고, 어쩔 수 없이 사람의 가능성과 한계 속에서 살다가, 결국에는 사람으로 죽어야 한다는 것을, 중장년이 되어서야 온전히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렸고, 석가는 일가족의 참혹한 죽음 때문에 고통을 받았다. 고통은 삶에 내재된 것이어서 고통 없는 삶은 없다.

교회에 다니면서 제일 부러웠던 사람은 신의 계시(啓示)를 받았다는 사람이었다. 절대자인 신의 임재(臨在)를 체험한 사람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잘 알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상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상상했다. 성령(聖靈)에게 혀를 맡겨 방언(方言)을 하는 은사(恩賜)를 받고 싶었다. 내 뜻이 아닌 당신의 뜻대로 살게 해 달라고, 내 입에서 내 말이 아닌 당신의 말이 나오게 해 달라고, 전지전능한 당신의 계시를 받고 싶다고 기도하였다.

믿음이 부족한 탓이었을까? 절실함이 없었던 탓일까? 나에게는 그런 은총(恩寵)이 주어지지 않았다. 나는 인격신의 실재에 대하여 회의감(懷疑感)을 갖게 되었다. 신이 있다면 꼭 여호와여만 하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갖게 되었다. 전지전능한 신(神)은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 나의 깊은 의문은 답을 찾지 못하였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부처와 산신(山神)을 믿었다. 큰방의 안쪽 벽에 작은 법당과 산신각을 만들고 지성(至誠)으로 불공(佛供)을 드리면서 공덕(功德)을 쌓았다. 만사(萬事)를 산신의 뜻으로 해석하였다. 하지만 어린 내게는 아무런 감흥(感興)이 없었다. 나는 무속(巫俗)이나 주술(呪術)의 힘을 믿지 않았다. 나는 점(占)을 치거나 사주팔자(四柱八字)로 길흉(吉凶)을 따져 보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 나도 잘 알 수 없다. 그냥 믿음이 가지 않았다. 굿이 끝나면 떡을 얻어먹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나이 삼십 대 중반에 우연히 불교를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연기(緣起)에 대한 인지적(認知的)인 이해는 있었으나, 실천적 차원에서는 몸에 배지 않았다. 앎이 일상의 삶으로 체화(體化)되지 않았다. 자성미타유심정토(自性彌陀唯心淨土)라는 통찰과 구세주 아미타불에 대한 신앙이 쉽게 어우러지지 않았다. 중생과 부처가 불이(不二)이고 자력(自力)과 타력(他力)이 불이(不二)라는 것에 대한 이해가 아미타의 본원(本願)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득도(得道)의 길은 아득하고 하산(下山)은 불가능했다.

여호와건 아미타건 인간이 만든 상상적 관념에 불과한 것일 아닐까? 마음이 허전하였다. 믿음이 없는 삶은 생명력이 빠진 마른 꽃 같았다. 힘들 때 내가 의지하고 섬길 수 있는 존재는 무엇일까? 어떤 상황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을 때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일까?

나는 무엇에 의지하고 누구를 섬기며 사는지 되돌아보았다. 나는 주변 사람들과 원만하기를 소망하고, 풍요롭게 먹고살기를 원하며, 건강하게 살기를 희망하는 존재였다. 그런 것들을 떠받치는 물질적 토대인 돈을 중요시하면서 사는 사람이었다. 물질주의자였다. 현대 자본주의와 기술문명에 젖어 사는 존재였다.

합리성(合理性)이 지배하는 삶은 신성(神性)이 사라진 삶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과학적 관점을 못 벗어나면 허무(虛無)의 늪을 벗어날 수 없다. 세상을 물질 덩어리의 집합체로 보면 나도 그런 물질 덩어리의 하나에 불과하다. 나는 이런 지나친 물질주의적 관점을 반성(反省)하기로 하였다. 나는 화학물질로 구성된 물질인 동시에, 기뻐하고 슬퍼하고 두려워하며 희망을 붙들고 사는 마음의 존재가 아닌가? 미워하기도 하고 고마워하기도 하면서 사는 ‘사람’이 아닌가? 나는 전자의 물질성 못지않게 후자의 마음 현상(現象)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특정 종교의 교리나 특정 존재에 대한 신앙에서 답을 찾지 않기로 하였다. 그 이유는 종교적 교리(敎理)를 앞세우면 특정 도그마에 매몰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차적인 관찰의 대상은 나 자신이어야 하며, 내가 사는 모습 자체를 정직하고 진실하게 살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숨을 쉬고 걷고 달린다. 목마르면 물을 마시고 배고프면 음식을 먹는다. 아프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는다. 친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시장에 가서 물건을 산다. 이런저런 세상사에 참여한다. 내가 사는 세상은 늘 누군가와 또는 무언가와 함께 열리고 전개된다. 나의 삶을 떠받치는 존재는 공기 하늘 땅 물 음식 병원 친구 시장 나무 꽃 등이다. 이것들은 나 아닌 것들이다. 나는 ‘나와 나 아닌 것들이 함께 여는 세상’을 살아간다.

없지 않고 있다는 것은, 없지 않고 있게 한 어떤 힘이 있기 때문이다. 나와 나 아닌 것들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나와 나 아닌 것들을 떠받치는 어떤 힘’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나는 그 ‘어떤 힘’을 감히 헤아릴 수 없다. 무한자인 그 힘을 유한자인 내가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 힘을 신(神), 절대자(絶對者), 무한자(無限者), 도(道), 천명(天命) 그 무엇으로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내 힘으로 이 세상에 오지 않았다.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나 아닌 것들 역시 그 자체의 힘으로 내게 오지 않았다. ‘어떤 힘’이 ‘나와 나 아닌 것들’을 없지 않고 있게 한 것이다. 나는 나와 나 아닌 것들을 존재하게 하는 어떤 힘을 부정할 수 없다.

내 뜻대로 사는 것 같지만, 내 뜻대로 살아지지 않는다. 미시적으로 보면 내가 내 의지를 따라 사는 것 같다. 하지만 거시적으로 보면 내가 사는 세상은 나를 보낸 자의 뜻에 따라 변한다. 그 뜻이 우연으로 나타날지 필연으로 나타날지 나는 가늠할 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그 존재를, 그 힘을, 그를 나는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이다.

삶에 파도는 늘 있다. 나는 파도 위의 작은 조각배다. 파도를 일으키는 그 힘은 여러 이름으로 내게 다가온다. 나는 그 힘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허리를 굽힌다. 교회에서는 여호와로, 절에서는 아미타로, 모스크에서는 알라로, 시(詩)에서는 그로 당신으로 불리는 그 힘의 다양한 이름들. 그 이름은 사람들이 편의상 붙인 이름일 뿐이다. 그 힘에, 그에게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없다. 그는 본디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는 내게 직접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아이의 미소로, 노인의 주름살로, 꽃의 향기로 자신의 존재를 내게 알린다. 나와 나 아닌 것이 함께 여는 내 세상은 그가 내게 선물한 것이다. ‘꽃 피는 세상’은 꽃이 내게 왔기 때문에 가능하다. 나와 꽃을 만나게 한 존재는 그이다. 내가 할 일은 그에게 감사하는 것이다. 눈앞의 꽃은 스스로 오지 않았다. 그가 내게 보낸 것이다. 내 세상을 찾아온 꽃에게 내가 할 일은? 꽃에게 감사하는 것이다.

그는 늘 내 곁에 있다. 그가 있기에 내가 있다. 내가 이 세상에 온 까닭은? 그가 나를 이 세상에 보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가 나를 이 세상에서 거두면? 나는 이 세상을 떠나갈 것이다. 나와 나 아닌 것들을 있게 한 그를 섬기며 사는 것은 나의 의무다. 나의 삶은 그가 보낸 것들 덕분에 풍요롭다. 그는 내 마음의 안식처다. 기쁨이다. 그는 나를 없지 않고 있게 했다. 또한 그가 내게 나 아닌 것을 보낼 때는 무슨 뜻이 있었을 것이다. 내가 할 일은 그 뜻을 성실하게 해석하고, 순수하게 그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다. 그에게 순종(順從)하는 것이다.

나를 이 세상에 내보낸 그를 섬기지 않으면 누구를 섬길 것인가? 내가 그를 섬기는 길은, 그가 보낸 나와 나 아닌 것들을, 내 세상을 찾아온 모든 것들을 섬기는 것이다. 내 곁에 있는 모든 사람, 모든 존재는 ‘내가 섬기는 그’가 보낸 다양한 모습의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아이 교사 의사 농부 상인은 물론이고 하늘 땅 나무와 꽃 모두 그가 내게 보낸 존재들이다. 나는 그들에게 감사하며, 그들을 섬기며 살 것이다.

나는 나의 뜻이 아닌 그의 뜻을 따라 살 것이다. 그의 뜻이 무엇인지를 늘 귀를 기울여 들을 것이다. 섬김 속에서 나는 평화를 얻는다. 위로받는다. 그의 품 안에서 나는 평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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