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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길에서

59. 무(無)의 힘

by 걍보리

오해와 이해, 불각의와 각의, 죄악과 회개는 불이(不二)다. 오해(誤解)에는 이해(理解)의 가능성이 들어 있다. 불각의(不覺義, 진실에 어두움,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에 물들어 있음)에는 각의(覺義, 깨달음)의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다. 죄악(罪惡, 교만, 인색, 질투, 분노, 색욕, 탐욕, 나태)에는 회개(悔改, Metanoia, 마음의 전환)의 가능성이 은닉(隱匿)되어 있다.

진실(眞實) 피안(彼岸) 천국(天國)은 거짓 차안(此岸) 지상(地上)의 것을 버릴 때 즉시 나타난다. 오해 불각의 죄악 속에 숨겨졌던 이해 각의 회개는 지금 여기를 떠나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견해(見解)와 태도(態度)의 전환(轉換)을 통하여, 나와 너와 세상을 다르게 볼 때(적확하게는 세상이 다르게 보일 때), 진실 피안 천국은 자신이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전개된다.

대개 이해 각의 회개의 가능성은 무지(無知) 탐욕(貪慾) 증오(憎惡)의 힘에 의해 억눌려 있다. 자신이 무지 탐욕 증오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눈치채기는 결코 쉽지 않다. 설령 눈치를 챘다고 할지라도 탐욕과 증오의 힘을 이겨내기 힘들다. 나쁜 짓인 줄 알면서도 나쁜 짓을 하는 것이 사람이다.

미움이 고통임을 알지 못하면 미움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누군가를 미워할 때는 그 미움이 고통이라는 것을 자각하기 힘들다. 미움에서 벗어났을 때의 해방감과 자유를 맛보기 전에는 도리어 미움이 쾌감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미움이 남을 불태우기 전에 자신을 먼저 불태우는 고통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면 미움의 불길을 벗어날 수 없다. 오해 불각의 죄악 역시 마찬가지다.

다행히 문득 미움이 자신의 심신을 괴롭힌다는 걸 느끼는 순간이 있을 수 있다. 그 순간의 마음이 바로 미움을 버릴 수 있는 좋은 계기다. 행운의 순간이다. 미워하는 마음도 미워하지 않는 마음도 모두 마음이다.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으면 마음을 전환하면 된다. 들고 있던 미움을 내려놓으면 된다. 이렇게 오해 불각의 죄악의 마음을 전환하는 것을 이해 각의 회개라고 한다.

우리는 종종 공부를 많이 해야 삶의 진실을 알 것이라고 오해한다. 내 생각에 진실은 아주 단순하고 소박하다. 무릇 목숨을 가진 생명은 즐거움을 좋아하고 고통을 싫어한다. 이 ‘진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이런 진실은 무슨 책을 많이 읽어서 아는 것이 아니다. 가방끈 길이를 늘여야 할 필요도 없다. 몸이 아프면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사랑의 기쁨에 눈을 뜨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행복의 길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깨닫는다.

우리는 영원히 살 것처럼 굴기도 하지만,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은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 ‘언젠가는 나도 죽지.’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삶은 영원하지 않고 유한하며(영원한 삶이 있는 것처럼 속이는 자들에게 속는 사람도 있지만), 덧없다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다. 몸이 늙어가는 것을 모르는 노인은 없다. 나이 들면서 인생무상(人生無常)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없다. 이런 깨달음(각의, 회개)의 기회는 특별한 수행(修行)이나 기도(祈禱)를 통해 오는 것이 아니다. 흐르는 세월이 가르쳐 준다.

무상(無常)에 대한 깨달음 속에서 세속적 가치에 대한 탐착(貪着)을 내려놓는 순간들이 있다. ‘그래그래, 내가 아무리 많이 가져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 내 무덤까지는 못 가지고 가지 않아?’라고 자신에게 속말을 하는 순간이 있다. 삶의 진실을, 진리를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순간이 있다. 허무감 속에서 탐착이라는 짐을 자신의 마음에서 내려놓는 그 해방의 순간을 원효는 시각(始覺)이라고 하였다. 하이데거는 권태나 불안 속에서 오는 통찰을 순간(Augenblick)이라고 하였다. 그 순간은 부처의 순간(佛性이 열려 드러남)이다. 본래적 실존(本來的 實存)이 회복되는 순간이다. 회개의 순간이다. 무심(無心)의 참나가 도래(到來)하는 순간이다.

마음을 열고 있으면 이런 순간은 누구에게나 올 수 있다. 오직 성직자나 수행자에게만 오는 것이 아니다. 이 깨달음은 침묵 속에서(타인과의 대화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어떤 불편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홀연히, 자신에게서 자신에게로 온다. 자신(불심 성령 본래적 실존)이 자신(중생심 죄인 비본래적 실존)을 부르는 형식으로 온다. 누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라고 혼잣말을 하는 순간이 있지 않은가? 그때는 참나가 거짓나를 흔드는 순간이다.

이 깨달음과 관련하여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이 깨달음의 가치를 스스로 알 수 있는지 여부(與否)다. 나와 너와 세상의 모든 것들이 ‘없지 않고 지금 여기에 이렇게 있다’는, 각각 자기의 모습으로 반짝이다 곧 사라질 것이라는, 우리의 만남도 곧 끝나기에 지금이 소중하다는, 이 순간이 곧 영원(永遠)이라는, 삶과 세상이 신비롭다는, 이 사실들을 놀라움과 감사의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 여부나 인식의 폭은 각자의 몫이다.

둘째, 경쟁과 갈등 속에서 의식주를 마련하고 생존하기 위해 애쓰는 마음(俗)과 집착을 내려놓은 깨달음(聖)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의 문제다. 속(俗)은 역사성(歷史性)을 갖고 있다. 빠른 속도로 변하는 현대 사회에서 끊임없이 세상사(世上事)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물정(物情) 어두운 부적응자(不適應者)가 된다.

오로지 세상사에만 탐착(貪着)하는 삶은 속(俗)에 매몰된 삶이다. 성(聖)의 깨달음에 의한 해방이 없으면 허무한 삶이다. 고통스럽기도 하다. 이와 달리 탈역사성(脫歷史性)을 띤 성(聖)에만 집착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역사가 지배하는 현실에서는 부적응을 초래한다. 탈속(脫俗)만을 추구하는 것도 병(病)이다. 성(聖)이건 속(俗)이건 어느 하나에만 매달리는 것은 건강하지 않다. 수행자(修行者)나 수도사(修道士)도 세상사에 무심하면 안 된다. 정치사회현실에도 관심을 갖고, 투표도 하면서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탈속(脫俗)이 현실도피(現實逃避)가 되어서는 안 된다.

대개 실제의 삶은 성속(聖俗)을 오가는 삶이다. 성(聖)에도 매이지 않고 속(俗)에도 매몰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아야 한다. 균형을 잡아야 한다. 늘 깨어 있어야 한다. 나는 어떠한가? 성(聖)을 체험했다가도 곧바로 속(俗)에 매몰된다. 이른바 내공(內功)이 약한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내공이 커서 성(聖)의 마음으로 속(俗)의 세상을 살아간다. 그에게는 사심(私心)이 없다. 그는 매우 공적(公的)인 삶을 산다. 위인들이 그러하다. 멸사봉공(滅私奉公)은 위인에게만 해당하는 말이다. 탐욕을 숨기고 거짓말을 일삼는 자들이 쉽게 입에 올릴 말이 아니다.

셋째, 깨달음(이해 각의 회개) 이후, 어떻게 깨달음을 잘 지켜나갈 것인가는 큰 숙제다. 성(聖)을 엿보았을지라도 속(俗)으로의 추락(墜落)은 피하기 어렵다. 오해 불각의 죄악에 빠지지 않으려는 헛수고 대신에, 늘 다시 이해 각의 회개의 마음으로 돌아서려는 결의(決意)가 중요하다. 사람은 유한(有限)한 시공(時空)을 사는 유한한 존재여서 넘어지지 않을 수 없다. 넘어지지 않으려 하는 대신에 늘 다시 일어서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어떤 선사는 제대로 깨달으면 동시에 일체 수행을 모두 마칠 수 있다는 돈오돈수(頓悟頓修)를 강조하였다. 좁은 내 견해로 보자면, 실제로는 어림없는 소리다. 우리 몸의 DNA가 그렇게 허락하지 않는다. 설령 깨달은 자라 할지라도 성(聖)과 속(俗)을 오가면 살아야 한다. 깨달은 뒤에 끊임없이 마음을 닦아나가야 한다는 돈오점수(頓悟漸修)가 타당하고 실제적이다.

머리 아픈 현실에서 늘 해방을 꿈꾸는 나는 도구(道具) 하나를 마련하였다. 내가 사용하는 도구는 무(無)다. 본래무(本來無, 本來無一物)의 줄임말이다. 세상의 온갖 유혹거리에 끌려 다니고, 이런저런 걱정거리로 헐떡일 때, 나는 속으로 ‘무(無)’를 되뇐다. 본래 나는 없었고, 본래 나의 소유물도 없었고, 추구하는 가치나 의미도 본래 실체가 없었고, 내가 돌아갈 곳도 본래무(本來無)라고. 너도 나도, 생(生)도 사(死)도, 불이(不二)로 그냥 어우러져 있다고. 나는 무(無)의 힘에 기대어 소박하고 단순한 나의 삶을 지키려고 애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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