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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길에서

58. 창가의 느티나무

by 걍보리

내 서재 창가에는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아파트를 지을 때 조경수로 심은 나무여서 수령이 많지 않고 키가 채 10m를 넘지 않는다. 지난 2월에 관리실에서 전지(剪枝) 작업 공고(公告)를 하였다. 나는 수형을 예쁘게 하기 위하여 잔가지만 다듬어 주는 작업일 것이라고 짐작하였다. 그것은 착각이었다.

스카이차가 오고, 완전무장을 한 수목관리사들이 달려들어 커다란 전기톱으로 굵은 가지들을 쑹덩쑹덩 잘라내었다. 순박하고 덩치만 클 뿐 반항할 의사도 능력도 없는 나무를 잔인하게 난도질하는 모습이 섬뜩하였다. 저래도 될까 싶었지만 ‘그래도 되느냐’고 그들에게 감히 묻지 못했다. 전지(剪枝)를 심하게 당한 나무는 강제로 발가벗겨지고 추행을 당한 것 같았다. 작업자들이 떠나고 잘린 가지들마저 트럭에 실려 나간 뒤, 팔다리가 다 잘린 토르소처럼 몸뚱이만 남은 느티나무의 몰골은 초라하고 가엾기 그지없었다. 고통스러운 울부짖음도 없고 쏟아지는 붉은 피도 없었다. 나무는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켰다. 바보처럼 본래 서 있던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마치 생명이 없는 바위처럼.(조경업자의 말에 의하면, 민원과 비용 그리고 환경 문제 때문에 전지를 심하게 한다고 한다.)

나무에겐 정말 생명이 없는 걸까? 아니다. 나무라고 할 말이 없을까? 아니다. 사람들이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할 뿐이다. 나는 깊은 연민의 감정을 느끼며 느티나무의 오돌토돌한 피부를 만졌다. 사람들에게 시달린 나무에게 사람인 내가 ‘미안하다고, 때로는 나 자신도 사람인 것이 싫다고’ 속말을 해 주었다. 시간은 흘러 7월이 되었다. 느티나무는 새로운 가지를 뻗었다. 가지마다 초록 잎을 내고 바람과 햇빛을 맞았다. 가여웠다. 고통 속에서도 나무는 죽지 않고 살았다. ‘살면 살아진다.’는 걸 여실하게 보여주었다. 그냥 고마웠다.

동물과 식물은 본디 같은 뿌리에서 출발하였다. 수십억 년의 진화 과정에서 다른 길을 걸었을 뿐이다. 둘 다 생활 기능을 갖추고 살아가는 유기(有機) 생물이다. 동물과 식물 둘 다 기본적인 유전자인 이중나선 구조의 DNA와 아데닌(adenine;A), 구아닌(guanine;G), 시토신(cytosine;C), 티민(thymine;T)이라는 네 종류의 염기를 가지고 있다. 염기서열과 몇 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우리와 흑인 사이에 차이가 있지만 같은 인간이듯, 우리와 코끼리 사이에 차이가 있지만 같은 동물이듯, 우리와 나무 사이에도 차이는 있지만 같은 생명인 것이다.

피터 볼레벤(Peter Wohlleben)은 이렇게 말하였다.

“캘리포니아 학자들은 초파리도 꿈을 꾼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래서 초파리에게 연민을 느껴야 할까? 아직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정도까지 공감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 설사 그렇다고 해도 숲으로 가는 감성의 길은 요원하기만 하다. 파리와 나무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사고의 장벽이 놓여 있다. 나무는 뇌가 없고 동작이 너무 굼뜬 데다 관심사도 전혀 다르고 정말 상상할 수도 없는 느린 속도로 일상을 살아간다. 나무가 생명체란 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지만, 모두가 별생각 없이 나무를 물건처럼 취급한다.”(「나무수업」 p.295)

그는 연구를 통하여 나무도 개성이 있고, 나무 사이에도 우정과 연대가 있음을 밝혔다. 우리가 사람 몸을 받아 환경에 적응하면서 사람으로 살아가듯이, 나무도 나무 몸을 받아 환경에 적응하면서 나무로 살아가는 것이다.

나는 얼마 전에 ‘사람은 이야기다.’라는 글을 썼다. 그 뒤로 「나무수업」이라는 책을 읽었으며, 나의 인간중심적인 생명관을 수정(修訂)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사람만 이야기가 아니라 나무도 이야기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대개 사람은 사물을 유용한 수단이나 도구로 대한다. 긴 세월 동안 왕과 귀족에게 노비는 거래되는 물건이었다.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엄연히 달라 지배자는 피지배자를 개돼지처럼 다루었다. 프랑스혁명 이후로 인권사상이 확산되었고, 칸트 이후로 인격은 수단이 아닌 목적이라는 인권사상이 보편성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인간 이외의 존재가 가진 권리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쟁 중이다.

요즘은 반려견이나 반려묘를 함부로 대하면 처벌한다. 동물권(動物權)을 인정하는 것이다. 반면에 식물권(植物權)에 대한 인식은 아직 보편성을 획득하지 못했다. 동물이나 식물의 권리를 인정하는 데 큰 장애는 동물이나 식물을 죽여서 먹어야 산다는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조건(條件)이 있다. 존중해야 할 동물이나 식물을 먹어야만 한다는 부득이한 상황은 매우 모순(矛盾)적이다. 그러나 그런 모순을 핑계 삼아 파괴적인 사고를 정당화하거나 타당한 대안(代案)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소유(無所有)가 벌거벗은 채 굶어 죽으라는 뜻이 아니듯이, 동물권과 식물권을 고려하는 판단을 한다는 것이, 먹어야 산다는 인간조건마저 무시하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자연이용이나 변형은 인정하되 무지(無知)나 탐욕(貪慾)에 의한 파괴(破壞)는 절제(節制) 하자는 뜻일 것이다. 태도에서는 중용이, 소비에서는 균형이 필요한 것이다.

나는 종종 인간의 문명(文明)이 이제 막 시작되었다는 생각을 한다. 수십만 년 전에 시작되었다고 추정되는 구석기시대가 실제로는 야만(野蠻)과 큰 차이가 없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문명다운 문명은 기원전 1만 년부터 시작된 신석기시대부터 열렸다고 보는 것이 그다지 틀린 생각은 아닐 것이다. 지구에 불가항력(不可抗力)적이고 파국(破局)적인 상황이 오지 않는다면 인간은 앞으로도 수만 년 이상(以上)을 살 것이다. 그런데 불과 1만 년 동안에 현재의 기술문명 세상을 만든 인간이 수만 년 뒤에는 어떤 세상을 살고 있을까? AI와는 차원이 다른 기술문명이 전개될 것인데, 그때가 되면 사람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별나라 여행을 하면서 살까? 그럴 수 없다.

모든 존재는 광속(光速)이라는 물리적 한계를 넘을 수 없다. 인간은 지구를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 (불가능하지만) 설령 우주선을 타고 일부 인간이 외계로 나간다고 한들 지구에 남은 절대다수의 인간에게는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화성(火星)을 식민지로 만든다는 구상도 헛소리다. 지구와 화성은 중력이 달라 화성에서 태어난 아이는 멸치처럼 생긴 화성인으로 자라고 화성인처럼 살게 된다. 그는 지구인이 아닌 화성인이다. 인간은 오직 지구에서만 인간이다.

기술문명의 발전 가능성은 인간의 수용능력에 달려 있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다. 따라서 기술문명 역시 어떤 극한으로 수렴(收斂)할 것이다. 기술문명의 발달이 무의미해지는 시점도 올 것이다. 기술문명의 발전이 인간복지에 더 이상 기여할 수 없는 상황이 그 때다. 그때가 되면 인간 사회에는 기술 혁명이 아닌 의식의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 그 혁명이 파괴적인 방향일지 아니면 건설적인 방향일지는 인간집단의 선택에 달려있다. 판단 기준은 한 인간이 다른 인간과, 한 집단이 다른 집단과, 인간이 동식물과 공존공생(共存共生)하려는지 여부이다. 이 기준이 자명(自明)한 이유는 모든 기술문명의 궁극적인 지향점(指向點)은 그 기술문명을 개발하고 발전시키려는 인간복지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나무와 내가 공존하기 위해서는 나무의 생태를 이해해야 한다. 나무를 한낱 물건이나 수단이 아닌 나무로 대해야 한다. 사람만 이야기가 아니라 나무도 이야기란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나무의 삶에, 나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나무를 존중해야 한다. 창가의 느티나무에게도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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