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나의 버킷리스트
요즘 나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지낸다. 가끔 참여하는 한두 가지 공식 프로그램은 있지만 그것마저도 가기 싫을 때는 안 간다. 그래도 괜찮다. 특별하게 책임질 만한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에 하는 일 중 가장 중요한 일은 발을 다쳐 외출이 어려운 아내의 명령을 받들어 시장으로 심부름을 다니는 일이다. 잔심부름은 그다지 힘들지 않다. 분기별로 모이는 친구들이 보고 싶다. 하지만 모임 장소까지 왕복 네다섯 시간이 걸리는 여정(旅程)을 생각하면 심신이 미리 피곤해진다. 그런 때는 가지 않는다. 게으른 것이다.
큰 병이나 사고가 없고 불행한 일이 없으면 행복이라 여기면서 산다. 이런 무취무색(無臭無色)한 일상에 파문(波紋)이 이는 순간이 있다. 아플 때, 권태로울 때, 무엇에 욕심이 생길 때다.
아프면 가치서열(價値序列)이 뒤바뀐다. 일상에서 중요했던 것이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실제로는 너무 소중하여 당연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연시(當然視)하거나 무시(無視)했던 것들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집 차 돈 등 온갖 재화를 섬기던 마음이 허망해지고, 그것들을 쫓던 시간이 아까워진다. 당혹감 속에서 혼돈에 빠진다. 마음은 균형을 잃는다. 질병은 내가 죽는 존재라는 것을, 내게 남은 시간이 유한하다는 것을, 시간이 가장 귀하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반복은 권태(倦怠)를 낳는다. 권태는 감각을 무디게 하고 일상에서 활력(活力)을 빼앗는다. 반복되는 일상의 지루함을 부수기 위해 이곳저곳으로 나들이를 한다. 가까운 곳으로 때로는 먼 곳으로. 즐겁게 살려는 사람들은 버킷리스트를 만든다. 좀 더 가치 있는 것을, 좀 더 자극적인 것을, 평생을 두고 미처 해 보지 못한 것을 죽기 전에 꼭 해 보기 위하여.
어떤 친구는 세상 곳곳을 다니면서 사진을 올린다. 좋아 보인다. 어떤 친구는 자신의 버킷리스트(bucket list)를 소개한다. 역시 좋아 보인다. 때로는 부럽다. 나도 버킷리스트를 만들어 보았다. 일부는 실현했지만 대부분은 그냥 꿈에 머물렀다. 아쉽기도 하고, 괜찮기도 하다. 일상의 리듬을 깨고 낯설고 새로운 기분을 북돋우려는 이런저런 시도들마저 시큰둥해질 때가 있다. 허무감이 엄습한다. 마음은 문득 길을 잃는다. 권태는 무섭다.
어떤 때는 무얼 잘하고 싶다는 의욕을 가져 본다. 목표한 일에 집중한다. 그런 마음은 갸륵한 마음이다. 그럴 때는 그런 마음을 내는 나 자신을 칭찬해 본다. 그런데 내 노력이나 능력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요행(僥倖)을 바라는 탐욕(貪慾)이 불길처럼 일어날 때가 있다. 어리석게도 그 불길에 휩싸이고 만다. 그 불길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다.
불길은 겸손(謙遜)과 관용(寬容)의 미덕을 불사른다. 질투와 분노를 증폭(增幅)한다. 나는 더 많이 소유(所有) 하지 못해 안달한다. 놀랍게도 그런 순간에는 무소유(無所有)의 삶을 보여준 사람들의 지혜나 조언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도리어 그들의 삶이 거짓이거나 비현실적이라고 느낀다. 육도윤회(六道輪回)의 덫에 걸린 것이다. 불길이 진정된 뒤에야 간신히 제정신을 차린다.
질병 권태 탐욕이 나를 흔들 때면 마음은 안식(安息)을 얻지 못하고 헤맨다. 현실적으로 생존하기 위해서는 물질에 대한 욕망과 대인관계에 대한 관심을 포기할 수 없다. 때로는 타인이 욕망하는 것을 나도 욕망하면서 유행(流行)을 따라가는 것도 생존 기술의 일부다. 나는 탈속(脫俗)적인 수행자(修行者)도 아니고 은둔(隱遁)에 익숙한 수도사(修道士)도 아니기에 결벽(潔癖)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세속(世俗)에 푹 절은 채 속물(俗物)로 사는 것은 더 싫다.
나는 인식의 지평을 넓히면서 살고 싶다. 오늘보다 더 나은 존재로 성장하고 싶다. 이웃과 따뜻한 관계를 맺고 싶다. 좀 더 자유롭고 책임감 있고 진솔한 사람이 되고 싶다. 이런 예쁜 꿈을 꾸면서도 종종 길을 잃고 헤맨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예쁜 꿈을 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욕망하는 것들이 나를 흔들기 때문이다. 흔들리기 때문이다.
‘내가 욕망하는 것들은 - 멋진 관계, 재화(財貨), 추억 그 외에 무엇이 되었건 - 나의 성숙과 평안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명확한 자각이 있어야 흔들리지 않게 된다. 나의 버킷리스트에 있는 모든 것들이 지향해야 할 최종 목적지는 ‘나의 성숙’이라는 걸 잊지 않아야 길을 잃지 않게 된다. 내가 성장하지 않는다면 내가 소유한 것들이 내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더 나은 나로 자라지 않는다면 공들여하는 체험 속에 무슨 유익함이 있단 말인가? 소유물에게 소유당한, 주객(主客)이 뒤집힌 꼴로 사는 것은 아닌가? 나의 궁극적인 버킷리스트는 ‘더 나은 나’ 임을 새기고 새겨야 헤매지 않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