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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홀로

더불어 홀로 2

by 걍보리

1. 나는 남이다.


나는 남이다. 지금의 나는 진짜 나처럼 보이지 않는다. 나는 그들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들이 싫어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들을 닮으려 하고 그들을 흉내 내며 산다. 유행을 놓치면 안 될 것처럼 생각한다. 그들과 같아지지 않으면 따돌림당할까 두려워한다. 그들의 생각이 마치 내 생각인 것처럼 말한다. 놀랍다. 나는 그들이다. 나는 남이다! 참된 나는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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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답게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그들로부터 탈출해야 한다.

나의 고유성을 가장 확실하게 해 주는 것은 무엇인가? 나의 죽음이다. 나의 죽음은 나의 개체성과 고유성을 도드라지게 한다. 죽음이 나만의 죽음이라는 말은, 삶이 나만의 삶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내가 태어나, 내 세상을 살다가, 내가 죽는다. 나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나의 시간을 산다. 나는 나의 출생과 나의 죽음 사이의 유한한 시간을 사는 유한한 존재다. 아무도 나를 대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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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간디나 김구가 아니다. 석가나 예수가 아니다. 나는 내 세상을 살며, 그들은 내 세상에 초대된 사람들일 뿐이다. 나는 나만의 고유한 출생과 죽음의 가능성에 대한 자각을 통하여, 나의 특별한 삶을 자각할 수 있다. 나 자신의 존귀함과 절대성을 성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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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적 관점에서 보면 부모가 먼저 있고 나는 나중에 있다. 세상이 먼저 있고 다음에 내가 있다. 그러나 주관적 관점에서 생각하면 내가 먼저 있고 부모는 나중에 있다. 내가 있음으로써 부모도 있고 세상도 있다. 나는 나의 세상을 살고 죽는다. 내가 내 세상이고, 내 세상이 나다. 나와 내 세상은 분리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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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과 혀가 먼저 있었을까 아니면 짠맛이 먼저 있었을까? 객관적 관점에서 보면 소금과 혀가 먼저 있고 짠맛은 나중에 있다. 그러나 나의 체험의 관점에서 보면 짠맛 세상이 열린 다음에 소금도 있고 짠맛을 아는 혀도 있다. 짠맛 세상이 열리지 않으면 소금도 없고 짠맛을 아는 혀도 없다. 일차적으로 짠맛 세상이 열려야 비로소 혀도 있고 소금도 있는 것이다.

선천적 시각장애인은 무지개를 시각적으로 경험할 수 없다. 색의 세계가 열리지 않기 때문이다. 색의 세계가 열린 뒤에야 무지개도 있고 무지개를 보는 눈도 있는 것이다.

혀와 소금의 만남으로 ‘짠맛 세상’이 열리듯이, 나와 너의 만남으로 ‘우리 세상’이 열려야, 비로소 나도 있고 너도 있다. 내가 있기에 네가 있고, 네가 있기에 내가 있다. 너는 내 세상이고, 나는 네 세상이다. 나는 내게 열린 세상의 경계를 넘어설 수 없다. 나의 삶 역시 내 인식의 지평을 넘어설 수 없다. 나는 내게 열린 세상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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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언제 시작되었는가? 나에게 있어서는 내가 태어난 순간 세상은 시작되었다. 내가 죽으면 세상도 끝난다. 그런 점에서 한 생명은 한 세상이다. 각각의 생명은 우주의 무게를 지녔다. 너도 나도 우주의 무게를 지녔다. 자신의 존엄성을 자각하자.

각각의 생명은 하나의 우주다. 한 송이 꽃이 피면 한 우주가 열리는 것이고, 한 송이 꽃이 지면 한 우주가 닫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세상의 모든 생명 하나하나가 신이요 부처라는 말은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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