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안녕하세요.
84년 8월 초 새벽. 배가 아팠다. 병원에 갔더니 위염이라고 하였다. 당시 나는 한국행동과학연구소 검사개발팀 팀원이었다. 사무실은 안국동 걸스카웃 회관에 있었다. 전화로 병가를 내고 하루를 쉬었다. 다음 날 출근을 했는데 이소장님이 불렀다. 직장 상사이자 대학원 은사님이었는데 일주일간의 유급휴가를 제안하였다. 큰 배려였다.
사무실 근처의 하숙집으로 돌아와 하루를 더 쉬었다. 몸이 좀 가벼워졌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다. 문득 대학을 함께 다닌 기석 형이 생각났다. 진도에서 근무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가 본 적이 없었다. 진도로 전화를 했다. 여름 방학 보충 수업을 하고 있으니 그리로 오라고 하였다.
진도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이었다. 서울에서 광주로 내려가 하룻밤을 잤다. 이튿날 광주에서 출발한 직행버스는 해남 옥동항에 도착하였다. 버스는 배에 실려 진도 벽파진으로 이동하였다. 버스는 거기에서 다시 이동하여 10여 분 뒤 진도버스터미널에 도착하였다. 먼 길이었다. 거기가 끝이 아니었다.
진도읍에서 임회면 십일시로 가는 완행버스를 탔다. 먼지가 자욱한 비포장 길을 40여 분쯤 달려 십일시에 도착했다. 지붕이 낮은 허름한 주택들 너머로 새로 지은 학교 건물이 보였다. 하얀 학교 건물은 마을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어서 단번에 눈에 띄었다. 운동장을 지나 정면 계단을 올랐다. 학교 현관문을 열고 복도 쪽으로 갔다. 교무실 표찰이 눈에 띄었다. 미닫이문을 열고 교무실로 들어섰다. 급사가 다가왔다. 낯선 사람이 나타나자 찾아온 용건을 물었다.
“누구를 찾아오셨나요?”
“이기석 선생님을 찾아왔습니다.”
“아, 선생님은 지금 3층에서 수업 중이세요. 여기가 이기석 선생님 자리예요. 잠깐 앉아서 기다리시겠어요?”
“네, 고맙습니다.”
나는 기다리지 못하고 3층으로 올라갔다. 어느 지점에 이르자 반투명 유리창 너머로 기석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반가웠다. 수업을 하는 형의 모습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다시 교무실로 돌아와 형의 자리에 앉았다. 한참 후에 급사가 끝종을 쳤다. 교무실 출입문이 열리고 여러 사람의 슬리퍼 소리가 몰렸다. 수업을 마친 선생님들이 교무실로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기석 형이 돌아오기 직전, 한 여선생이 형의 자리 너머로 잠시 머물렀다 지나갔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만약 형이 그 여선생보다 조금만 더 일찍 왔다면 그녀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무표정했다. 말총머리에 계란형 얼굴을 하고 있었다. 까맣게 그을린 얼굴이 흑진주로 보였다. 그 순간은 그대로 각인되었다. 그 장면은 지금도 또렷하게 떠오른다. 그녀가 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그녀가 내 눈길에서 멀어지는 순간 뒤에서 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종구, 먼 길 왔네.”
세상은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에서 약간의 선택을 할 수 있을 뿐이다. 큰 틀에서 보면 운명론자의 설명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행운(幸運)도 운(運)이요, 불운(不運)도 운(運)이다. 불운은 언제든지 다양한 얼굴로 갑자기 들이닥칠 수 있다. 어찌 보면 하루하루가 불운을 간신히 피한 행운의 연속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오늘 하루를 감사하라고 하지 않겠는가?
불운이 갑자기 오는 것처럼 행운도 뜻하지 않게 오는 경우가 있다. 내가 이 선생을 만나려고 진도에 간 것이 아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어떻게 만나러 가겠는가? 또 교무실에서 그 짧은 순간 그녀가 내 눈앞에 나타날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그냥 운명이었다. 내가 이 선생을 만난 것은 운 중에서 행운이요, 행운 중에서도 큰 행운이었다.
이튿날 오후, 형과 함께 학교 근처의 찻집으로 갔다. 형이 동료 선생님 두 사람을 불렀다. 나는 처음 만나는 두 여선생에게 인사를 하였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이기석 선생님 후배입니다.”
두 사람도 가볍게 인사를 하였다. 한 여선생은 기석 형의 예비처제인 서 선생이었다. 또 한 여선생은 바로 전날 본 이 선생이었다. 네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기억에 없다. 활달한 성격의 서 선생은 끊임없이 말을 쏟아냈고 이 선생은 그냥 웃기만 하였다. 나도 특별하게 할 말이 없어 커피만 마셨다. 이 선생은 그날 그 자리에 서 선생과 함께 차를 마시러 잠시 나왔었다는 사실은 확실하게 기억하였다. 그러나 나를 본 기억이 없다고 하였다. 낯선 나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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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일상은 관계 맺기다.
어떤 관계 맺기를 하며 살 것인가?
나는 늘 누군가와 함께
무언가와 함께 나의 세상을 연다.
사랑하면 밝은 세상이 열린다.
미워하면 어두운 세상이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