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자유인
“이 구두 어때요?”
내가 굽이 낮고 코가 둥그런 겨자 색 구두를 들어 보였다. 잠시 구두를 살펴보던 이 선생이 의자에 앉아 신고 있던 검붉은 색 구두를 벗었다. 오른쪽 엄지발가락 뿌리 부분이 제자리에서 왼쪽으로 조금 튀어나와 있었다. 무릎을 살짝 덮는 길이의 개더스커트 아래로 조심스럽게 발을 내밀어 새 구두에 집어넣었다. 몇 걸음 걸어본 뒤 거울 앞에 서 보았다.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발이 편하네요.”
우윳빛 터틀넥 스웨터, 연한 모카 색 조끼와 개더스커트, 겨자 색 구두의 어울림이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계산을 마친 뒤 헌 구두를 종이가방에 담았다. 우리는 구두 가게를 나왔다. 가끔 이 선생의 눈길이 새 신발을 향하였다. 그녀의 잔잔한 미소를 통하여 편안함과 만족감을 짐작할 수 있었다. 충장로 거리에 사람이 넘쳤지만 내게는 환영(幻影)처럼 느껴졌다. 어둠이 짙어지는 떠들썩한 그 거리에 그녀 홀로 걷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이야기하면 그녀는 표정을 섞어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한 점이 생겨 질문을 하면 짧게 대답하였다. 그리고 걸었다. 말이 적은 사람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신발을 사주면 그 신을 신고 더 멋진 사람에게 가버린다는 속설이 있다. 그런 것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이었다. 발을 편하게 해 주는 신발을 고르기가 어려웠다는 그녀가 지금 편하게 걷고 있지 않은가? 좋은 신발로 그녀의 마음을 사보겠다는 얄팍한 셈법 같은 것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나는 혼잣말을 하곤 했다.
‘그녀를 만나면 얼마나 즐겁고 행복한가?’
‘내가 사랑할 기회를 주니 얼마나 고마운가?’
‘그녀에게 사랑을 구걸하지 말자. 강요하지도 말자.’
‘나를 만났을 때 그녀가 즐겁고 행복하기를 소망할 뿐!’
사랑으로 인한 상처를 가진 사람들은 안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이기적이거나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버리지 않는, 상대방의 생각과 감정을 존중하지 않은 관계는 결국 커다란 아픔과 후회를 남긴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녀에게 머물거나 떠날 수 있는 자유를 주었다. 내가 할 일은 단순하게 사랑하는 것이었다.
‘그냥 사랑할 뿐!’
집착을 내려놓자 편해졌다. 더 기쁘고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자유로운 자만이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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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벗어나 낯선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여기를 떠나 저기에 서 보고
저기를 떠나 다시 여기에 서 본다.
캐리어를 끌고 시공간을 바꿔보지만
결국 내 마음의 여행이다.
어디를 가든 내가 선 곳은 내 세상이다.
나는 결코 내 마음 밖을 벗어나지 못한다.
자유로운 철새처럼 살고 싶지만
울타리를 못 벗어나는 텃새로 산다.
자유인이 되려면
떠남과 머묾에 매이지 않아야 한다.
자유인이 되어야 비로소
사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