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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걍보리 Apr 09. 2023

너는 내 세상이다

26. 선물

  “종구야, 네 엄마 찾으러 가거라.”

  초가집 처마가 좁은 툇마루에 한 뼘 그늘을 드리우는 어느 여름날 한 낮, 마루 끝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있던 이모가 갑자기 내게 말을 던졌다. 분명히 나의 오른쪽에는 엄마와 외할머니 그리고 왼쪽에는 이모가 나란히 앉아 있는데 날더러 엄마를 찾아가라니!    

  “엄마가 여기 있는데 어디 가서 찾아?”

  “이놈아, 여기 엄마는 너를 다리 밑에서 주워 온 엄마야. 그러니까 너는 진짜 엄마를 찾아가야지!”

  내가 입을 삐죽이며 울상을 지었다. 세 여인네는 웃고 있었지만 나는 심각하였다. 나를 낳아 준 엄마가 어느 다리 밑에서 사는지도 모르고 어떤 얼굴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하지? 끝내 내가 눈물을 글썽이며 마루 아래로 내려서자 어른들이 크게 웃었다. 

  “너는 왜 애를 울리고 그래!” 

  엄마가 나를 안고 심술쟁이 이모를 야단쳤다.

  ‘지금 엄마가 가짜 엄마라면, 진짜 엄마를 어떻게 알아보지? 엄마가 나를 낳는 것을 본 적이 없지 않은가? 이모 말처럼 지금 엄마는 분명히 가짜 엄마이고, 진짜 엄마는 따로 있지 않을까?’

  갑자기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무서워졌다. 진짜 엄마가 사는 다리가 어디에 있는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광주천 주변 거지들이 떠올랐다. 

  ‘혹시 다리 밑에 있던 거지들 중에 진짜 엄마가 있는 것은 아닐까? 너무 가난해서 나를 버린 것은 아닐까? 거기로 찾아가 볼까? 그런데 어떻게 찾아가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제법 나이를 먹은 뒤에야 그 다리가 엄마 다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그런 장난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내 배꼽은 어떤 여인이 나를 낳았다는 명백한 증거이고, 세상에서 나를 늘 품어준 여인이 바로 엄마일 것이었다. 

  나는 엄마 다리 밑에서 태어났다. 지금 이 생명을 선물로 준 것이다.

      

  기억 속의 어머니는 나를 등에 업거나 손을 잡고 늘 어딘가를 걷고 있는 사람이다. 아침의 노안 길, 해 질 녘의 나주 길, 월산동 길, 서동 길, 백운동 길, 염산 길, 방림동 길, 학동 길, 금남로 길, 양동 길, 수기동 길, 능주 길, 임성리 길, 명산리 길, 송정리 길, 영광 길, 신두암 논길, 금성산 길, 백동 길, 군서 길........

  ‘어머니는 내 손을 잡고 왜 이곳저곳을 나와 함께 걸었을까?’ 

  어머니는 길을 걸은 것이 아니었다.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20대였던 어머니는 갈 길을 잃고 있었다. 분명히 남편은 있으나, 다른 여자와 사는 남편을 어찌할 것인가? 아비는 있으나, 아비 없이 자라는 이 아들을 어찌할 것인가? 어디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정답은 있는 것 같으나 잡을 수 없고, 다른 해답도 찾을 수 없으니, 헤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 역시 헤매는 어머니를 따라 이리저리 떠돌고 헤맸다.

  어머니는 선하고 조용한 사람이었다. 늘 웃는 얼굴이었다. 단 한 번도 어머니에게 크게 야단을 듣거나 매를 맞아본 적이 없다. 종종 혼자 우는 모습만을 보았을 뿐이다. 외할머니는 어머니가 너무 순해서 남편도 다른 년에게 빼앗기고 모진 세상을 이겨내지 못한다고 안타까워하셨다.   

  아주 어렸을 때 또래들과 함께 풀밭에 오줌을 누었는데, 아랫도리가 뜨뜻해졌다. 당황하여 일어나 보았더니 옷은 물론이고 이불까지 오줌으로 다 적셔져 있었다. 이런 일이 몇 번 있었지만, 어머니는 곧바로 씻겨주고 옷을 갈아입혀주었을 뿐 크게 야단을 치지 않았다.

  무얼 잘못 먹었는지 몹시 배가 아픈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나를 등에 업고 체내는 집을 찾아갔다. 업혀 가면서 내내 울었다. 커다란 들판 길을 걸어서 갔다. 얼마나 갔을까? 어떤 초가집 안으로 들어갔는데, 어두침침한 방 안쪽에는 한 아저씨가 앉아 있었다. 그 아저씨를 중심으로 벽을 따라 여러 아주머니들이 빙 둘러앉아 있었다. 나와 같이 아파서 온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사람들이 차례대로 그 아저씨 앞에 가서 앉으면, 아저씨는 자신의 손가락을 상대의 입안으로 집어넣어 무언가를 끄집어냈다. 사람들이 캑캑거렸다. 

  내 차례가 되어 어머니가 나를 아저씨 앞으로 데려갔다. 어머니의 무릎에 앉아있는 상태에서 내게 입을 벌리게 했다. 아저씨의 손가락이 내 입안으로 쑥 들어왔다. 나는 구역질을 하였다. 아저씨의 손에는 내 배에서 나온 무언가가 들려있었다. 먹은 고기가 소화가 안 되어 체했었다고 설명을 하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나를 다시 업고 밤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일곱 살이 되어 초등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된 때였다. 어느 따뜻한 봄날 아침, 어머니는 학교에 가는 내게 신신당부를 하였다.

  “너 오늘 학교 파한 뒤에, 집으로 오지 말고, 법성 작은 할머니 댁으로 오너라.”

  당시 법성 면소재지에는 할아버지의 동생이 살고 있었다. 종조(從祖) 할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였다. 쪼글쪼글하게 마른 붉은 대추 같은 얼굴에 이가 다 빠졌고 눈은 항상 빨갰다. 입에서는 늘 술 냄새가 났는데, 내가 인사를 해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낡고 기울어져 금방 무너질 것 같은 집에서 거무튀튀한 문지방을 베개 삼아 술 냄새를 풍기며 코를 골며 자는 것이 일상이었다. 종조(從祖) 할머니는 둥그런 얼굴에 살집이 있고 높은 어조의 목소리를 가진 분이었다. 그 집에 가면 할머니는 내 손에 찐 고구마를 쥐어주었다. 당숙과 당숙모는 우스갯소리를 잘하여 재미있었다. 그들은 나를 놀리면서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다. 

  “솜 한 근 하고, 쇠 한 근 하고, 어느 것이 더 무거울까?”

  “쇠!”

  “하하, 종구 바보. 다 같은 한 근이야!”  

  종조할머니는 좁은 마당에서 술을 빚어 가난한 살림을 꾸렸다. 항아리 두 개를 겹쳐 만든 것 같이 생긴 소줏고리가 인상적이었다. 거기에서 이슬이 떨어지듯 한 방울씩 떨어지는 알코올을 받아 법성토종을 만들었다. 작업을 할 때면 장작불이 뿜어내는 열기로 주변이 펄펄 끓었다. 가끔 순경들이 밀주 단속을 나왔는데, 그들에게 약간의 돈을 쥐어주고 돌려보냈다. 그럴 때마다 주변 사람들 입단속을 제대로 못해 신고를 당한 것이라고 분개하였다. 

  불법인 줄 알면서도 종조할아버지 가족들은 그 일을 계속했다. 먹고살기 위해서. 아마 순경들도 그런 사정을 알고 있지 않았을까? 어머니는 그 할머니를 따뜻한 사람으로 기억하였다. 늘 어머니의 입장에 서서 위로하는 말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날 학교가 끝난 뒤 신두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어머니의 당부대로 동기재를 넘어 종조할머니 집으로 갔다. 한복 위에 노란색 스웨터를 입고 있던 어머니가 검게 번들거리는 좁은 마루에 앉자 종조할머니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도망치려는 어머니에게 떠나지 말라는 뜻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햇살은 따뜻했지만 어머니의 마음은 춥고 심란하지 않았을까?  

  “저 어린 새끼를 봐서라도, 자네가 참고 살아야지 어쩌겠는가?”

  어머니와 함께 있으면 주변사람들로부터 늘 듣던 익숙한 말이었다. 어머니가 만나는 사람이면 누구나 하는 말이었다. 큰고모도 당숙모도 종조할머니와 같은 말을 하곤 하였다. 어머니는 어린 나 때문에 ‘어쩌지 못한 채’ 살았던 것이다. 그 말은 어머니를 수렁에서 건져내지 못했다. 떠나는 어머니를 붙들지도 못했다. 어머니는 내게 한 술 밥을 얻어 먹인 뒤에 버스를 타고 법성을 떠났다. 어머니와 나는 노안 산 중턱에 있던 외가로 도망쳤다. 나는 일곱 살 어머니는 스물여덟 살이었다. 

  어머니에게 친정 더부살이 신세는 편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시집보다는 나았던 것이다. 그곳에서 지내는 내내 어머니는 아프고 회복되기를 반복하였다. 이십 대의 젊은 몸이었지만 이미 망가져버린 것이다. 주변 사람들은 화병과 고된 시집살이가 어머니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가끔 어머니는 혼자서 어딘가를 다녀오곤 했다. 먼 훗날에야 그때 어머니가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대구나 논산을 다녀왔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왜 그랬을까? 어머니의 마음속에 아버지는 어떤 존재였을까?   

  강자는 약자를 이해하기 어렵다. 배부른 자는 배고픈 자의 심정을 헤아리기 어렵다. 아버지나 조부모는 어머니의 심정을 알려하지 않았던 것 같다. 배려하지도 않았고 모질고 박절하게 대했던 것 같다. 인간 정봉순이 그 사람들에게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또 나는 무엇이었을까?

  아이를 키우는 여인에게 남편의 지원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 어머니는 어떤 경우에도 내 손을 놓지 않으려 하였다. 동생이 죽은 뒤에 나는 어머니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러나 내가 열한 살이었을 때, 친할아버지가 나를 노안에서 법성으로 데려간 뒤에는 나와 함께 살 수 없었다. 어머니 곁에서 희망의 끈이 멀어지자 어머니는 남았던 힘마저 잃은 것은 아닐까? 법성으로 때로는 광주로 나를 보러 온 적도 있었다.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그러나 나는 너무 어려 어머니의 위안이 되지 못하였다. 든든한 버팀목도 될 수 없었다. 엄마보다 엄마 손에 들린 사탕에 눈이 먼저 가는 철부지였다. 

  열두 살 되던 해 음력 정월 초이레에 어머니는 노안 산에서 돌아가셨다. 내가 어머니 곁을 떠난 지 이년 만이었다. 서른세 살. 하얗고 해맑은 얼굴을 가진 순하고 순한 성품의 젊은 여인이 저 세상으로 떠났다. 너무 젊었다.   

   

  내 마음에는 어린이가 산다. 

  좁고 가느다란 산길을 따라 내달린다. 한참을 달려가다가 엄마가 안 보이면 뒤돌아 다시 뛴다. 엄마가 웃으며 걸어온다.

  “넘어질라. 얌전히 걸어라.” 

  듣는 척도 안 한다. 엄마를 한 바퀴 돈 다음 다시 앞으로 달린다. 

  “엄마, 빨리 와.” 

  앞으로 달리다 뒤돌아본다. 엄마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엄마는 영원히 서른 살 여자로 남아 있다. 그 산길을 엄마와 함께 다시 걷고 싶다. 엄마가 늙었다면 어떤 모습일까?

  마음은 나무를 닮았다. 마음에도 켜켜이 나이테가 쌓인다. 나이테 사이사이로 추억이란 이름의 옹이가 남아 있다. 몸 곳곳에 박혀있는 그 옹이들을 만지작거린다. 문득 그 옹이를 하나씩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찬찬히 들여다보고 싶다. 

     

**********     


엄마!

엄마는 저에게

삶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가없는 사랑을 주셨습니다.    

 

크고 작은 사랑을

알게 모르게 베풀어 주신

세상의 모든 분께 큰 절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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