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걍보리 Apr 07. 2023

너는 내 세상이다

25. 사람이 그러면 못쓴다.

  외할머니는 나의 스승이다. 사람답게 사는 사람의 삶은 아름답다는 것을, 고통스럽더라도 견디고 이겨내며 품격 있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자신에게 속고 세상에 속으면서도 마땅히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어떤 것도 사람보다 더 소중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저마다의 삶이 희로애락으로 엮어진 한 편의 이야기라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내 세상을 찾아온 현인이었다.     

  어렸을 때 외할머니가 밭에 가면 나는 강아지처럼 졸랑졸랑 따라갔다. 열 살이었지만 학교에 다니지 않으니 할 일도 없었고 함께 놀 친구도 없었다. 산속 외딴집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밭일을 하는 동안 나는 노란 양은 주전자에 물을 담아 밭으로 가져갔다. 남은 시간에는 혼자 놀았다. 밭 근처 계곡에서 크고 작은 바위를 뒤집어 가며 가재를 잡았다가 놓아주면서 놀았다. 가재가 잘 안 보이면 다슬기를 주웠다. 어떤 때는 숲 속에 숨어 있는 새집을 발견하기도 했는데, 어른들은 알을 만지거나 새를 괴롭히면 안 된다고 하였다. 

  운 좋게 까마중을 발견하면 반가웠다. 달착지근한 열매 맛에 빠져 입이 보라색으로 변하는 줄도 모르고 따 먹었다. 설익은 것을 먹거나 많이 먹으면 입이 아렸다. 까마중은 풀무더기가 썩은 거름더미 근처에서 잘 자랐다. 일이 끝날 무렵이면 잡초가 뽑힌 밭골은 황토색 바닥을 드러냈다. 밭으로 오가는 좁은 길가에는 밭에서 뽑아낸 잡초 무더기가 시들고 말라갔다. 그 사이사이로 강아지풀이 긴 목을 쭉 내민 채 바람을 타고 춤을 추었다. 

  어느 순간 손으로 낫을 잡았다. 낫을 휘둘러 강아지풀 목을 뎅강뎅강 잘라냈다. 가만히 멈춰 있는 것보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을 자를 때 더 재미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강아지풀 목을 단숨에 자르는 데는 집중과 기술이 필요하다. 

  좌우로 흔들리는 풀이 오른쪽으로 기우는 순간 각도를 잘 맞추어 낫을 휘둘러야 한다. 처음에는 날카로운 날에 딱딱한 풀의 목이 수직으로 맞닿는 느낌이 든다. 뒤이어 낫날이 가벼운 저항을 받으면서 가느다란 풀 목의 한가운데를 통과하는 데, 정확하게 잘리면 ‘툭’ 소리와 함께 목이 잘린 강아지풀이 하늘로 가볍게 치솟는다. 그 짧은 순간 묘한 쾌감이 손으로 전해진다. 권력의 맛이었다. 마치 할머니의 잡초 뽑기와 같은 수준의 일을 하는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낫을 휘두르고 있을 때 할머니가 나를 불렀다.

  “아가, 강아지풀이 무슨 잘못을 했냐?”

  “아니요.”

  “함부로 자르지 마라. 그러면 못쓴다.”

  나는 움찔하면서 낫을 내려놓았다.  

  내가 잘못을 저지르면 외할머니는 짧게 한 마디를 하였다.

  “사람이 그러면 못쓴다.”

  그 말은 몸에 스며들었다. 힘이 있었다. 늘 살아 있었다. 함부로 살지 못하게 하는 회초리 같은 말이었다. 그 말은 구체적인 내용을 지시하지 않는다. 단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과 해서는 안 될 것이 있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할 뿐이다. 선택의 기로에 설 때마다 그 말이 되살아났다. 사람이 함부로 살면 안 되는 것이었다. 

  실수 없이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 그러나 실수를 하더라도 얼른 제자리로 돌아와야 할 일이다. 잘못 없이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 그러나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할 일이다. 마땅히 그래야 사람이다. 그 말 덕분에 갈림길에서 고민하는 시간을 줄일 수 있었다. ‘사람이 갈 길’을 선택하면 되었다. 비뚤어진 행위를 하기도 하고 어긋난 마음을 가졌다가도 되돌아설 수 있었다. 그 말은 외할머니가 내게 유산으로 물려주신 것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어머니의 막내 동생인 금용 외삼촌이 갑자기 돌아가셨다. 외할머니에게는 2남 2녀의 자녀가 있었다. 외할머니는 56세에 서른세 살의 큰딸을 잃었다. 나의 어머니였다. 어머니가 낳은 아이들이 죽는 것도 보았다. 큰딸을 잃은 뒤 채 5년이 지나지 않아 서른한 살의 막내아들을 잃은 것이다. 

  외삼촌이 신문사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밤늦게 돌아오던 길이었다. 골목에서 주인의 손을 벗어난 사냥개 두 마리를 만났다. 실랑이를 벌였다. 사냥개에게 물리지 않으려고 벽돌을 던지고 막대를 휘두르며 한참 동안 싸웠다. 뒤늦게 주인이 와서 개들을 붙들었다. 다행히 크게 부상당한 곳은 없었다. 하지만 크게 놀랐었던 모양이다. 한밤중에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다. 의사는 충격에 따른 사망으로 보았다. 그 상황에서 세상 경험이 부족했던 숙모님은 적절한 대응을 못하였다.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하였다. 

  갑자기 29세의 젊은 며느리는 과부가 되었다. 며느리와 함께 두 명의 손자와 한 명의 손녀가 남았다. 며느리 혼자 힘으로 아이들을 다 기를 수 없었다. 돈을 벌어야 하는 며느리는 바빴다. 여유가 생기면 아이들과 함께 지냈고, 상황이 어려우면 아이들을 시어머니인 외할머니에게 맡겼다. 외할머니는 사연 많은 아들과 딸이 낳은 여러 손자 손녀를 한꺼번에 보살펴야 했다. 나도 그 아이들 중 한 명이었다. 외갓집은 마치 유치원이나 고아원 같았다.  

  여기저기서 예쁘고 젊은 과부를 흔드는 바람이 불어왔다. 소문은 한 자리에 머무르지 않았다. 이리로 흘러왔다 저리로 흘러갔다. 이 사람 저 사람이 외할머니에게 이런저런 소문을 들고 왔다. 입방아를 찧었다. 외할머니는 말없이 그저 듣기만 하였다.

  어느 명절날, 가족이 한자리에 모였다. 외할머니는 홀로 된 작은 며느리를 먼 곳으로 심부름 보냈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을 모두 모이게 한 뒤에 이렇게 말하였다.    

  “내 작은 며느리는 참으로 고마운 년이다. 서방이 없어도 혼자서 자식들을 기르기 위해 애쓴다. 서방 없이 사는 젊은 년의 서방질이 무슨 문제냐? 내게는 죽은 아들보다 살아서 자식들을 돌보는 며느리가 더 중하다. 앞으로 내 앞에서 작은 며느리 뒷말하는 사람과는 상종을 하지 않겠다.”

  아무도 대꾸를 못하였다. 그 이야기는 작은 외숙모에게 전해졌다. 작은 외숙모는 시어머니의 손을 잡고 울었다. 외할머니도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내 나이 34세 때, 52세의 큰 외숙부가 세상을 떠났다. 당시 외할머니는 77세였다. 외할머니는 네 자녀 중 작은 딸을 제외한 세 자녀를 자신보다 앞세웠다. 여러 손자들이 죽는 꼴도 보아야 했다. 죽음을 앞둔 큰아들 옆에서 외할머니는 목메어 울었다. 학동 도로변 허름한 집 사랑채의 비좁은 방은 살이 썩어가는 냄새로 가득하였다. 당뇨로 발이 문드러지고 있었다. 신음 소리가 마당으로 흘러나갔다. 고통을 참지 못한 숙부가 숙모에게 고함을 질러댔다. 그런다고 고통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었다. 끔찍했다. 

  “내 새끼야, 내 새끼야, 어찌할 거나, 어찌할 거나.”

  외할머니는 ‘끄윽, 끄윽’ 울었다. 목이 쉬었다. 내게는 눈물을 닦아드릴 힘이 없었다. 무려 반년 동안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결국 다시는 빛을 못 보게 되었다.

  외할머니는 1912년에 염산면 소재지의 부잣집에서 큰딸로 태어났다. 열여섯 살에 열네 살의 외할아버지와 결혼하였다. 백동마을 지주(地主) 집안의 맏며느리가 되었다. 일본의 지배와 대동아전쟁, 민족해방, 6.25 전쟁을 겪었다. 6.25 때 어느 날 소작인들에 의해 일가족 다수가 죽임을 당했다. 그날 우연히 그 자리에 없었던 사람은 살아남았지만, 마을에 남아있던 가족들은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정월 제삿날에는 선대(先代)와 그날 죽은 사람들을 합한 19개의 젯밥이 제사상에 동시에 올랐다. 내게는 그 모습이 그저 그런 평범한 일상으로 여겨졌다. 어린 나는 제사상에 숨은 비극을 미처 헤아릴 줄 몰랐던 것이다.

  외할아버지는 트라우마에 시달렸던 것 같다. 재산 관리에 소홀하였다. 일본과 만주까지 떠돌던 방랑벽에 가족을 잃은 상처가 겹쳤다. 재산문서를 불태우는 등 비일상적인 행위도 하였다. 결국 집안 살림은 성실하신 외할아버지 동생인 어머니의 작은 아버지가 책임을 졌다. 외할아버지가 안 계시는 동안에는 조카들의 양육과 교육도 떠맡았다. 어머니의 결혼도 그분이 책임지고 추진하였다. 큰 조카인 어머니를 아끼셨던 까닭에 당시에 일반 가정집에서 갖기 힘들었던 최신식 재봉틀도 혼수로 사 주었다. 외할머니는 어머니가 밤늦게까지 재봉 일을 할까 걱정하였다. 그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고향을 떠나 강원도와 지리산, 낯선 섬 등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양조장과 방앗간까지 운영하면서 풍요로웠던 가정형편은 한순간에 기울었다. 내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외할아버지는 박수무당이 되었다. 그 어려운 시기에 산속의 작은 초가집에서 나와 어머니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외할아버지는 사람들의 사주팔자를 보고, 굿도 했다. 굿을 할 때는 징을 두드리면서 온갖 주문을 외웠다. 무명천으로 만든, 굳게 묶은 고리가 다 풀릴 때까지 굿을 하였다. 고리가 잘 풀리면 굿이 일찍 끝났다. 잘 풀리지 않으면 굿을 지속하였는데, 어떤 때는 날이 밝을 때까지 계속하기도 하였다. 나는 징소리를 들으면서 잠들었다. 

  외할아버지가 가장 많이 한 일은 사람들의 의뢰를 받아 묘지 명당자리를 찾는 것이었다. 바깥출입을 많이 하였는데, 묘지 터를 찾는데 필요한 나무로 만들어진 둥근 나침반을 항상 가지고 다녔다. 어른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나무나침반을 두툼한 복주머니 속에 보관하였다.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한 나침반의 자침은 끊임없이 떨면서 움직였다. 방바닥에 가만히 두어도 자침이 계속 움직여서 신기하였다.  

  60년대 초반부터 70년대 초반에 이르는 십여 년간은 극심한 가난이 가족을 덮쳤다. 조밥, 밀가루 수제비, 고구마밥, 무밥, 콩나물밥도 제대로 먹기 어려운 날이 많았다. 밥에서 쌀을 구경하기 힘들었다. 고구마로 끼니를 때우는 경우가 많았다. 나물 반찬은 고사리 돌나물 냉이 달래 버섯 등 야산에서 캐 온 것들로 만들었다. 쑥으로는 국을 끓여 먹었다. 밭에서는 배추 가지 도라지 무 등을 키웠다. 산에서 도토리를 따다가 물에 담가 떫은맛을 우려낸 뒤 묵을 만들어 먹었다. 가끔 굿을 하면 시루떡과 과일을 먹을 수 있었다. 시루떡을 만들 때 항아리에 붙어 있던 딱딱한 시룻번은 산골에서 먹을 수 있는 과자였다.

  어쩌다 가족들이 돼지고기를 먹었다. 정말 맛있었다. 내가 더 먹고 싶다고 하였다. 고기를 쉽게 사 먹을 형편이 안 된 상황이었는데도 철없는 나는 계속해서 고기를 찾았다. 외할머니가 궁여지책으로 값싼 돼지비계를 조금 사 왔다. 끼니때마다 무에 비계를 조금씩 넣어 끓여 주었다. 나만을 위한 별식이었다. 처음에는 맛있게 먹었지만 며칠 지나자 비계 맛에 질렸다. 

  “나 이제 돼지고기 그만 먹을 거야.”

  내 말이 끝나자마자 함께 밥을 먹던 식구들이 모두 크게 웃었다. 

  외할아버지가 노안 금성산에 자리를 잡고 굿당을 십 년 넘게 운영하던 중 우연히 큰 행운이 찾아왔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삼 년쯤 지난 때였다. 누군가의 묘터를 새로 잡아주었는데, 묘지를 옮긴 뒤로 그 사람에게 좋은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 사람이 새 집을 지을 자금을 크게 지원해 주었다. 외할머니는 집을 짓는 일 전체를 직접 관리하였다.  

  수많은 일군들을 동원하여 금성산 중턱에 커다란 기와집을 지었다. 공사 규모가 작지 않았다. 집에서 300여 미터 떨어진 산등성이를 깎고 채석장을 만든 뒤 화강암을 채굴하였다. 다이너마이트로 거대한 바위를 발파하면 온 산이 떨렸다. 십리 정도 떨어진 노안역에서도 ‘쿵’ 하는 소리를 또렷하게 들을 수 있었다. 석수장이들이 채석장에 모여서 화강암을 직육면체 두부 모양으로 쪼았다. 화강암에 정을 대고 쇠망치로 두들기는 똑딱똑딱 소리가 소나무 숲으로 스미고 산꼭대기로 올라갔다. 

  많은 인부들이 힘을 모아 채석장에서 집터까지 바위덩이를 옮겼다. 산중턱에서 하는 일이어서 평지보다 더 힘들었다. 중장비를 동원할 수도 없는 위치였기에 모든 일은 인력이나 가축의 힘을 이용해야 했다. 산 능선에 평평한 집터를 만들기는 쉽지 않았다. 산비탈에 높다란 축대를 쌓았다. 많은 양의 바위를 사용하였다. 

  육면체의 바위덩이들을 집을 짓는 데도 사용하였다. 집의 사면을 직육면체의 화강암으로 빙 둘러쌓았다.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천년만년 살 성채를 쌓는 것 같았다. 훗날 긴 장마 끝에 산사태가 나서 흙과 자갈은 물론이고 작은 바위들까지 부엌과 지붕으로 밀어닥쳤을 때도 화강암 집은 견고하게 버티며 끄덕도 하지 않았다. 집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안전하였다. 나중에 산사태 수습을 위해 산으로 올라온 공무원과 마을 사람들이 집의 튼튼함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높은 산 중턱에 왜 그런 집을 지을 생각을 하였을까? 자신은 물론이고 후손들도 아주 오래 살 수 있는 집을 짓고 싶었던 것 같다. 쉽게 무너지지 않을 집을, 바로 그 자리에 짓고 싶었기에 단단한 화강암을 쌓아 튼튼한 집을 지었을 것이다. 집이 커서 한 지붕아래 큰 살림집과 산신각을 동시에 만들었다. 현재는 사찰로 바뀌어 수행하는 스님들이 살고 있다. 

  여름밤에는 넓은 마당에 여러 개의 평상을 펼쳐놓고 대가족이 모여 팥죽을 쑤어 먹었다. 그때 멀리 무등산 위로 달이 떠올라 끝없이 펼쳐진 들판을 비추면 딴 세상에 온 것 같았다. 달이 없는 밤에는 어둡고 넓은 들판 끝까지 별들이 가득하였다. 별들이 싼 별똥별은 하늘을 가로질러 밝은 노란색 실선을 그었다. 어떤 것은 짧고 어떤 것은 길었다. 사십 리 너머의 송정리 불빛은 하늘에서 땅으로 흘러내린 별처럼 반짝였다. 큰집과 넓은 마당에서 사람들은 편안하였다. 

  모든 것은 변한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한동안 큰 외숙부는 그 집을 중심으로 사회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큰 아들이 중학교로 진학을 하게 되자 외숙부는 가족들을 이끌고 광주로 이사를 하였다. 무등산 자락에 터를 잡고 한약을 처방하며 사주를 보는 일을 하였다. 비교적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다. 

  당뇨가 심해진 외숙부가 건강을 잃고 세상을 뜨자 남은 대가족은 가난의 수렁에 빠졌다. 셋집 구하기도 어려운 처지가 되었다. 가족들이 각자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외할머니는 큰며느리를 따라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의 산동네로 와서 십여 년을 살았다. 큰 외숙모는 식당에서 일을 해서 가족을 먹여 살렸다. 

  산비탈에 지어진 이층 집의 반지하방은 비좁고 빛도 잘 들어오지 않았다. 큰길에서 집으로 가는 골목길은 몹시 가팔랐다. 겨울이 되어 눈이 얼면 연탄재 없이는 오르내리기도 힘든 곳이었다. 낮에는 인적이 드물어 한적하였다. 외할머니는 낮 동안 말 상대도 없이 혼자 지냈다. 밤이 되어야 며느리나 손자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긴 낮 동안 무슨 생각을 하면서 지냈을까? 눈이 멀어 문밖으로 나설 수도 없었다. 10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 동안 그 어둠과 고요의 막막함을 어떻게 견뎠을까? 세상사 꿈같다던 당신의 말씀을 되새김질하면서 지냈을까? 사는 것이 꿈이라면, 외할머니가 겪은 길고 긴 삶이 끔찍한 꿈이라면, 도대체 그 악몽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옹색한 월세 방에서 긴 시간을 홀로 지내면서 할머니의 몸은 점점 작아졌다. 어른 몸이 소녀 몸이 되었다. 작아지고 작아져 어린이처럼 작아졌다. 마지막에는 몸을 태아처럼 웅크린 채 숨만 쉬었다. 더 이상 작아질 수 없게 되자 다시는 일어날 수 없는 깊은 잠을 잤다.

  1912년 남서쪽 바닷가에서 시작한 91년간의 긴 여행은 2002년 중부 내륙의 낯선 땅에서 끝났다. 외할머니는 피붙이들의 죽음과 고통을 너무 많이 보았다. 그 길은 비탄의 길이었다. 외할머니의 죽음은 희망과 절망, 슬픔과 체념, 고뇌와 연민이 켜켜이 새겨진 이야기 한 편을 완성하였다. 자신의 몸으로 낳은 생명의 불꽃들이 속절없이 사그라지는 참담함을 눈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그 슬픔을 위로받기도 전에, 세상 파도로부터 남은 사람들을 지켜내고 보살피기 위해 서둘러 일어서야 했던, 고통 속에서도 사람의 향기를 잃지 않았던, 죽기보다 더 힘든 삶을 버티고 살아낸 외할머니 이야기는 내가 더 이상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 무(無)로 돌아갈 것이다. 나는 어떤 이야기를 만들고 무로 돌아갈까?

  나무꾼들에게 밥과 물을 아끼지 않았던, 굿을 마친 뒤에는 음식을 마을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었던, 길손을 빈손으로 보내지 않았던 나의 외할머니. 사람이 사람다우려면 마땅히 누구에게나 따뜻해야 한다고 일러주던, 어미 아비 잃은 손자 손녀들을 차별 없이 거두었던, 며느리들과 주변인들의 존경을 받았던 나의 외할머니. 성실한 삶이 참혹하게 무너지는 끔찍한 절망 속에서도 품격을 잃지 않았던, 선인선과 악인악과를 믿고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도 선하게 살았던, 참된 종교인이었던 나의 외할머니. 엎드려 큰 절 올립니다. 

    

********** 

    

내 삶의 조건들은

나를 나로 세우면서 강하게 구속한다.

     

거기에서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다.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다.   

  

가지와 열매가 

뿌리를 떠날 수 없듯이     


부조리한 이 삶을 어찌해야 하는가?

이 고해(苦海)를 어떻게 건너야 하는가? 

    

기꺼이 건너야 한다.

기꺼이!

작가의 이전글 너는 내 세상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