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누구나 자신의 짐을 지고 간다.
내 몸에는 아버지의 피가 흐른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피도 함께 흐른다. 그들은 나의 뿌리다. 나는 그들을 떠날 수 없다. 그들은 여전히 내 세상의 중심에 앉아있다. 내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것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는 내 인생의 덫이자 풀기 어려운 문제였다. 아버지 스스로도 자신의 문제를 잘 풀지 못했다.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몰라 헤맸던 것 같다. 죽기 직전까지도 자신의 죽음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풀어야 할 숙제가 많이 남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의 인생 출발은 좋았지만 중간도 끝도 그렇지 못했다.
한 사람도 그가 맺은 관계의 차이에 따라 여러 가지 얼굴로 나타난다. 아버지는 할머니의 자부심이자 숭배의 대상이었다. 일가친척들에게는 자랑이자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내게는 경멸과 분노의 대상이었다. 주변의 사내들에게는 호인이었고 뭇 여성들에게는 호감의 대상이었으나 어머니에게는 나쁜 남편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내가 그에 대해 아는 것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사실에 놀랐다.
‘아버지는 어디서 어떻게 살았을까? 그는 어떤 삶을 희망했을까?'
나는 그에 대해 약간씩의 조각난 기억들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그는 어머니를 어떤 사람으로 생각했을까? 또 나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그가 어머니나 나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해 그로부터 구체적으로 들어본 것이 별로 없다. 단지 그의 태도를 통해 막연하게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와 대화를 나눈 시간은 짧았다. 그와 공유하는 기억도 거의 없다.
‘그래도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아닌가? 왜 이렇게 아는 것이 없지?’
한 지붕 아래서 함께 산 기간은 채 두 달도 되지 않았던 만큼 얼굴을 마주 대하는 일이 드물었다. 함께 살지 않았던 까닭에 그가 어디에서 어떻게 살았으며 또 어떻게 사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 누가 제대로 말해 주지도 않았다. 주변 사람들의 대화를 통하여 전해 들은 수준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가 학창 시절 공부를 잘했다는 것, 대학생 때 학생 대표를 했다는 것, 간부후보생 출신의 군인 장교였다는 것, 불미스러운 일이 있어 명예롭지 못하게 대위로 제대를 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들었다. 내가 명확하게 아는 것은 군 시절 상관의 도움으로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에서 일했었다는 것, 그것도 그리 오래 하지 않았다는 것 정도다. 군인이었을 때 강원도나 대구 논산에서 살았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단 한 번도 그곳에 가본 적이 없다.
나는 그를 잘 모르고 살았다. 그러나 그가 내게 던진 그늘은 너무 짙어 어둠이었다.
‘내가 경멸한 것이 그의 실상이었을까? 아니면 허상이었을까?’
그는 내게 상처를 주었다. 나도 그에게 상처를 주었을 것이다. 때로는 드러내놓고, 때로는 보이지 않게 미워하고 싸웠다. 그는 어머니와 나를 또 죽은 동생들을 내팽개치고 학대하였다. 동생 셋은 어려서 죽었고 어머니 역시 서른셋 나이에 병들어 죽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도 미성년자였던 나를 제대로 보호하지 않았다. 그가 나를 대하는 태도를 통해 짐작해 보면, 그에게 나는 차라리 없었더라면 더 좋았을 불편한 존재가 아니었을까? 아버지 뒤에는 그런 그를 감싸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있었다.
‘아버지와 조부모님에 대한 나의 분노의 크기를 그분들이 짐작할 수 있었을까?’
제대로 몰랐을 것이다. 대개 우월한 입장에 선 사람은 힘이 없는 사람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고통은 약자의 몫이다. 강자 스스로 진지한 노력을 하지 않을 경우, 강자가 약자를 이해하기는 어려운 까닭은, 약자의 마음을 헤아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약자는 살아남기 위해 강자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오랜 세월 동안 내가 그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싫었다. 안경을 벗고 거울을 보면 어떤 때는 내 얼굴에 그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기분이 나빴다. 얼른 다시 안경을 썼다. 그를 닮았다는 것에 화가 났다. 한 때는 내 몸에 그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 싫었다.
‘아, 너무 싫어.’
내 몸이 혐오스러웠다. 이를 꽉 물고 몸서리를 쳤다.
나는 여러 얼굴을 가지고 있다. 그중 버릇없고, 비웃고, 고분고분하지 않고, 저항하고, 적대적인 표정의 얼굴은 내면 가득히 아버지에게 반항하면서 만들어진 얼굴이다. 그를 거부하는 태도는 나중에 세상의 모든 권위에 저항하는 태도로 성격이 바뀌었다.
아버지의 영향은 지금도 여전히 존재한다. 일상에서 그 영향을 느낄 때는 여러 생각과 감정이 함께 떠오른다. 아버지와 볼썽사납게 싸운 경우는 있었으나, 아름다운 추억을 함께 가질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다. 가족들이 모여서 함께 여행을 한 경우가 몇 번 있었다. 배를 타고 고모가 살았던 석만도에도 가 보았고, 에버랜드와 속리산에도 함께 가 보았다. 하지만 솔직하게 나는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즐겁지 않았다. 늘 낯설고 서먹서먹하였다. 마지못해 그와 가족놀이를 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를 만났을 때 진정으로 기뻤던 적이 있었던가? 기억에 없다. 지금도 그를 떠올리는 것은 편치 않다. 이런 감정은 내 몫이다.
현실이 아닌 마음속에서 그와 싸운 시간은 너무 길었다. 그를 향한 미움 때문에 나 자신이 고통을 받았다. 그를 향한 미움이 나를 괴롭혔다. 대개 고통은 피해자의 몫이다. 그 고통은 그가 작아 보였을 때 비로소 줄어들었다.
내게 있어서 그는 말을 앞세우는 사람이었다. 어쩌다 만나면 내게 무엇이 필요한지 물었다. 납부금이나 용돈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내게 절실한 것이었기에. 그는 금방 돈을 보내줄 것처럼 말하였다. 그러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는 약속을 실현시키는 자가 아니었다. 자신이 한 말을 아무 생각 없이 먹어버리는 사람이었다. 그의 말은 가볍고 무게가 없었다. 몇 차례의 실망과 분노를 겪었다. 그 뒤로는 그의 말의 진정성을 의심하였다. 내 의심은 거의 틀리지 않았다.
기껏해야 일 년에 한두 번 마주칠까 말까 하였으니 그럴 법도 하였다. 눈앞에 안 보이니 까맣게 잊어버리고 살았을 것이다. 아마 그도 자신의 삶을 꾸리느라 바빴을 것이다. 그란 그가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였다면, 절대로 그럴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학창 시절 그에게 헛된 기대를 하면서, 그의 허상과 싸우면서, 인생의 많은 시간을 허비해 버렸다. 나는 들끓는 분노에 시달렸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아버지라는 존재를 거의 모르고 살았다. ‘아빠’라는 말은 너무 낯설어 내 세상에는 없는 말이었다. 나는 어린 시절, 아니 평생 동안 ‘아빠’라는 말을 해 본 적이 없이 살았다. 말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 법이다. 그는 내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훗날 나이가 들어서 사무적으로 ‘아버지’라는 호칭을 사용했을 뿐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야 그는 뒤늦게 내 세상에 나타났다. 그다지 아름답지 않은 모습으로.
‘내가 아버지의 존재를 진정으로 감사하고 기뻐한 적이 있었던가?’
거의 없었다. 어떤 때는 일부러 감사해 보려고 노력도 해 보았다.
‘아버지 덕분에 내가 세상에 태어났고, 이 멋진 하늘을 볼 수 있지 않은가? 감사해야 하지 않은가?’
그것은 그럴듯하였지만 너무나 억지스러웠다. 정직하게 그냥 미워하기로 하였다. 잘못된 기분은 없는 법이다. 나는 오래도록 세상에 태어난 것이 싫었다. 그런데 어떻게 감사할 수 있었겠는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내가 처한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어머니가 있는 세상’과 ‘어머니가 없는 세상’은 색깔이 달랐다. 내가 힘들 때 돌아가서 쉬고 위로받고 편히 잠들 수 있는 곳이 없어진 것이다. 내 마음은 집시가 되어 오래도록 헤맸다.
자녀를 마땅히 보호하고 길러야 할 책임과 의무는 친부모에게 있지 않은가? 옷과 신발을 사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대상은 친부모가 아닌가? 부모 외에 누구에게 요구할 것인가? 누구를 탓할 것인가? 부모 외의 주변인들은 나에 대해서 어떤 의무도 없었다. 자식은 부모에게 희망일 수 있다. 나는 그들의 희망이 아니었다. 그들이 배려해야 할 우선순위에 내가 있을 수 없었다. 주변인에게 내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혈연적 인간적인 배려였다. 부모로부터 받을 수 있는 수준의 배려는 아니었다.
당시 동거인들의 이런저런 판단과 결정이 설령 내게 부족해 보여도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학교에 납부금을 내지 못했어도 누구 탓을 할 수 없었다. 동거인들의 입장에서는 나의 불평을 들어주지 않았거나 온전히 들어줄 수 없었을 것이다. 어디 납부금뿐이었겠는가? 불평을 해서 기대가 충족되지 않으면 나만 상처받을 것이 뻔했다. 차라리 기대하지 않는 방법을 썼다. 기대하지 않음으로써 서운해하지도 않게 되었다. 그것이 나의 적응 방식이었다.
실제로 그들이 내게 이런저런 배려를 해 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었다. 굶지 않았고 헐벗지 않았고 잠잘 곳이 있었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더 비참했을 것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오른팔이 부러졌다. 그때 나를 동생처럼 보살피고 열심히 찜질을 해 준 사람은 셋째 고모였다. 접골원으로 데려가 깁스를 하게 해 준 사람은 막내삼촌과 사촌누나였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축농증 수술을 할 때에도 반이비인후과에 데려가 치료를 해 준 사람 역시 막내삼촌이었다. 덕분에 나는 수년 동안 시달렸던 두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당시에 고모와 사촌누나는 미션스쿨에 다니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따라 교회에 다녔다. 성가대가 좋아 10대 이후로도 교회나 성당과의 인연을 이어갔다. 열성을 가지고 학생회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성서를 반복해서 읽으면서 심취하기도 했다. 성직자의 길도 상상해 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30대 중반 무렵에 교회와의 인연은 실망으로 끝났다. 내 탓일까? 아니면 내가 다니던 교회 탓일까? 그곳에는 예수가 쫓겨나고 없다고 느꼈다. 어쨌든 나의 성서와 교회문화에 대한 이해는 그 시절의 인연 덕분이다.
기대가 없으면 불만도 없는 법이다. 그런데 예외가 있었다. 아버지였다. 불행하게도 나는 아버지로부터의 정상적인 지원을 기대했다. 어쩔 수 없었다. 함께 살지는 않았지만 그는 어떤 형태로건 아들인 나를 정서적으로 경제적으로 지원해 줄 것이라고 믿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는 그런 일을 소홀하게 하였다. 학창 시절 내내 학비와 생활비 부족으로 시달렸다. 힘들 때마다 나는 아버지를 원망했다.
언젠가 할아버지에게 납부금 용지를 내밀었다.
“네 아비에게 달라고 해라.”
할아버지의 말을 듣고 입을 다물었다. 거의 만나지 않고 사는, 어디 사는지도 모르는, 연락도 잘 안 되는 아버지에게 돈을 달라고 하라고? 그 순간 생긴 분노는 누구를 향했겠는가?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아니면 누구를 원망할 것인가? 누군가를 향해 분노를 표출하지 않으면 어떻게 버티고 살 수 있었겠는가?
아버지를 향한 불만은 풀리지 않았다. 쌓인 불만은 분노가 되었다. 그 미워하는 감정은 멀리 떨어져 사는 아버지에게 가지 않았다. 갈 수도 없었다. 수신자에게 도착하지 못한 편지가 발신자에게 돌아오듯, 그 분노는 아버지에게 가지 못하고 내게로 되돌아와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내가 쏜 화살이 내 가슴에 박혔다.
나는 우울과 분노 사이를 오가면서 살았다. 심한 감정 기복은 나를 지치게 했다.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나의 그런 고통을 알고 있었을까?’
아버지의 태도로 볼 때 몰랐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무책임한 사람이었다. 나의 고통은 온전히 나만의 문제였던 것이다. 학창 시절이 끝날 때까지, 직장을 갖고 경제적으로 독립할 때까지 내 세상에는 미움과 분노의 파도가 출렁였다.
분노는 컸지만 그 기분을 친척들 앞에서 함부로 드러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동거인들에게 아버지를 원망하는 말을 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주변 사람들에게 나쁜 놈으로 보이면 더 손해일 것 같았다. 화가 나도 착하고 순한 척해야 했다. 할아버지를 비롯한 주변인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버리지 않고 돌봐준 은혜도 모르는 나쁜 놈이라고 비난하지 않겠는가? 그런 놈을 누가 우호적으로 대해주겠는가?
눈치를 안 보고 살 수 없었다. 갈 곳 없는 사람은 말과 행동을 더 조심해야 하는 법이다. 기분과 생각을 숨겨야 하는 것이다.
중고등학교 시절, 방학이 되면 노안에 있는 외가로 가서 지냈다. 그곳은 내가 마음 편히 쉬고 먹을 수 있는 곳이었다. 외할머니는 희끄무레하게 버짐이 피어 있는 창백한 내 얼굴을 손으로 문질러 보곤 하였다. 외할머니는 늘 나의 건강을 염려하였다. 학기 중에는 금용 막내 외삼촌이 외할머니의 심부름으로 학교를 종종 다녀갔다. 내가 건강을 제대로 유지하는지 궁금하였던 것이다.
스물여섯 살에 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첫 월급으로 외할머니에게 속옷을 사다 드렸다. 외할머니는 내 손을 붙들고 한참을 크게 울었다.
“내 새끼야, 내 새끼야. 죽지 않고 살았구나. 고맙다, 고맙다. 너마저 죽을까 봐, 마음 졸이며 살았는데, 마음 졸이며 살았는데.”
외할머니는 내 손을 오래도록 놓지 않았다. 딸과 세 손자가 먼저 죽고 한 손자만 살아남았으니, 그것도 불안정한 생활을 계속하는 모습을 보았으니, 외할머니는 마음을 놓지 못했던 것이다. 그 시절 나의 안전과 성장과 행복을 외할머니만큼 간절하게 원했던 사람이 또 있었을까? 나를 행복을 간절하게 기원해 준 사람이 외할머니 말고 또 누가 있었을까? 아버지를 비롯하여 나의 친족 중에 나의 건강과 장래를 외할머니만큼 염려한 사람이 있었을까? 외할머니의 심정을 헤아리기 어렵지 않았다.
대학에 진학하면서 반(半) 독립 상황이 되었다. 입주제 가정교사, 과외, 장학금 등으로 근근이 버티면서 지냈다. 어느 날 아버지는 나와 함께 술을 마시자고 하였다. 그때 자신의 과거이야기를 하였다. 왜 어머니나 나랑 함께 살지 않았는가에 대한 변명 같지 않은 변명을 하려는 의도가 있어 보였다. 즐겁지도 편하지도 않았다.
내가 열 살이었을 때 아버지가 노안 산으로 찾아왔던 일을, 학교에 다니지 않는 나를 그냥 둘 수 없어 법성으로 데려다 학교에 보내라고 할아버지에게 부탁했었다는 것을, 그래서 내가 정상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했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였다. 그가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을 것이며, 대학생도 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는 산골에서 살면서 나를 가르치지 못했던 어머니의 어리석음을 비난하는 것 같았다. 나를 배움의 길로 이끈 아버지나 할아버지에게 감사하고 효도하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놀랍게도 그동안 어머니에게 남편 노릇을 제대로 못한 것에 대해, 내게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못한 것에 대해, 죽은 동생들에 대해 미안해하는 것 같지 않았다.
‘도대체 그에게 나는 또 어머니는 어떤 존재였을까? 어머니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현실은, 어머니가 고통 속에서 죽어간 현실을 왜 생각하지 않은 것일까?’
그는 매우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다. 설령 빈말로라도 “남편 노릇, 아빠 노릇 제대로 못해 미안하다.”라고 했었더라면 나도 아버지를 좀 더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았을까?
어머니와의 결혼식, 처가에서의 신혼 생활, 기대에 미치지 못한 외가에서의 경제적 지원, 어머니에 대한 실망, 대학동기 여자와의 연애 등 여러 이야기를 하였다. 물론 자신의 입장에서 경험한 것들이었다. 어느 순간 그의 말은 지켜야 할 선마저 넘었다. 차마 글로 옮기기 어려운 말을 부끄럼 없이 쏟아냈다. 자식 앞에서도 할 수 있는 말과 해서는 안 될 말이 있다. 말은 가려서 해야 하는 법이다. 인간 정봉순이 그에게는 한 여자였지만 내게는 어머니였다. 모욕감에 몸이 떨렸다.
‘그것이 자신의 부도덕이나 무책임에 대한 변명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내가 왜 아버지를 미워하는지, 분노하는지, 거부하는지 그 이유를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그저 반항적인 기질을 가진 아들로 보려 하였다. 가출 등 여러 문제의 원인을 아버지 자신이 아닌 내 기질에서 찾으려 하였다.
어리석게도 아버지에게서 구할 수 없는 것을 구하려 하였다. 어머니와 나와 죽은 동생들에게 진심 어린 용서를 구하는 아버지를 보고 싶었다. 허망한 기대였다. 그는 나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대했다. 나의 고단한 삶에 대한 이해를 기대했다. 역시 부질없는 기대였다. 그는 내가 겪은 고통과 분노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린 내가 겪은 고단함을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아들의 고통을 모르고, 호소에 반응하지 않는 아버지가 어떻게 아버지일 수 있겠는가?
세상을 떠나기 몇 개월 전 병실에서 이런 말을 하였다.
“네 엄마에게 죄를 많이 지어서 이렇게 죽을병에 걸린 것 같다.”
그러나 “너에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나는 침묵하였다. 임종을 앞두고 나와 둘이 있을 때도 이렇게 말하였다.
“네 이복동생들에게 미안하다.”
그 이유는 설명해 주지 않았다. 짐작이 될 듯 말 듯하였다. 역시 나에게는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나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
영화 <변산>의 주인공 학수는 아버지에게 포악을 부리면서 대놓고 분노를 표출한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화해하고 갈등을 마무리한다.
‘나도 그렇게 아버지에게 거친 분노를 드러내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내 감정을 억눌렀다. 함께 대놓고 싸우면 생길 수 있는 화해의 계기를 만들기 싫었다. 끝까지 그를 증오하면서 살고 싶었다.
‘화해를 원하면서도 화해를 거부하는 모순된 감정과 태도를 지니고 산 까닭은 무엇일까?’
증오는 내가 고통을 견디며 살게 해 주는 힘이었다. 그와 다르게 살고 싶었다. 다른 존재가 되고 싶었다. 그에게 반항하면서 나는 나를 나답게 키웠다. 그와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해서 애를 썼다. 만약 그 분노마저 없었다면 나는 내 목소리를 갖지 못하고 비실거렸을 것이다.
실제로 아버지의 잘못은 아버지의 사과로 끝나거나 없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나의 분노를 풀어 줄 능력이 없었다. 마음자세도 되어 있지 않았다. 내 굳은 마음을 녹여줄 수 있는 어떤 모습을 내게 보여 주지 못했다. 어차피 내가 아버지를 용서함으로써 끝날 일이었다. 그러나 용서를 구하지 않는 아버지를 용서한다는 것은 너무나 어색한 일이었다.
어쨌든 그의 사과가 없었기에 그의 진심을 알 수 없었다. 용서할 수도 없었다. 언젠가 나와 아버지를 모두 아는 사람에게 내 속마음을 이야기하였다. 그가 나를 위로하였다.
“정말 미안하면, 미안하다는 말을 꺼낼 수도 없는 거야. 아마 그랬을 거야.”
나와 비슷한 성장 과정을 겪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기분은 개운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내게 준 상처도 있지만 나 역시 그에게 상처를 주었다. 어떤 때는 그의 요구를 냉정하게 거절했다. 나의 도움 요청을 거부하던 그의 손이, 내게 도움을 구하는 손으로 바뀌었을 때, 그가 뻔뻔해 보였다. 내가 직장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그는 종종 돈을 보내달라는 연락을 했다. 때로는 직접 찾아왔다. 숨어있던 울분과 상처가 거절하라고 외쳤다.
그가 내 앞에 나타나는 것 자체가 싫었다. 접촉하고 싶지 않았다. 어떤 형태의 화해의 기회도 갖고 싶지 않았다. 화해를 차단함으로써 그가 마음의 짐을 내려놓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그렇게 복수하고 싶었다. 속으로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나를 더 이상 당신의 아들로 대하지 마! 나는 당신의 자식이 아니야. 당신이 너무 싫어. 미치게 싫어. 제발 나를 부르지 마. 꺼져, 꺼지라고!’
나와 아버지는 혈연적으로 또 서류상으로 부자 관계에 있었지만 평생토록 두터운 정신적인 유대감을 갖지 못하였다. 나는 마음을 열지 않았고, 오래도록 옹졸하게 굴었다. 무늬만 아버지와 아들 관계였다. 속마음을 드러내놓고 진솔하게 대화할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회피하였다. 어쩌다 만나도 겉도는 이야기만 하였다. 대개 아버지가 이야기할 때 건성으로 들었다. 의미 있는 반응을 하지 않았다. 진지한 대화는 하지 않았다. 말없이 비웃고 있었다.
‘당신은 어머니와 나를 있으나마나 한 존재로 여겼잖아? 나도 당신을 없는 사람 취급하고 싶어. 제발 다가오지 마.’
그를 무시함으로써 치졸하게 괴롭히려 했다. 얽힌 인간관계 때문에 차마 부모 자식 관계를 단절하지 못하고 유지했으나 그를 존중하지 않았다. 나의 냉담 때문에 그도 그것을 눈치로 알지 않았을까? 잘 모르겠다.
나는 법성의 친인척들과 따뜻한 인간관계를 이어왔다. 작은아버지와 작은어머니, 큰고모부와 큰고모를 비롯하여 당숙들이나 당숙모들은 언제나 나를 환대해 주었다.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니와 함께 지낸 경험이 있는 어른들은 오래도록 어머니를 그리워하였다. 어머니를 기억하는 법성 사람들은 누구나 어머니와 나를 가엾게 여겼다. 변함없이 나를 다정하게 대해 주었다. 지금도 그러하다. 어머니의 따뜻한 인간미가 나를 외롭지 않게 한 것이다.
친인척들과 이어온 진솔하고 우호적인 관계를 고려한다면, 아버지와 나의 관계는 불행한 것이다. 아버지와의 관계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할머니에 대한 나의 불편한 감정 역시 불행한 것이다. 고모 삼촌은 물론이고, 고창이나 미국에서 사는 할머니의 조카들과 내가 아주 가깝고 다정하게 지내는 것을 생각하면.
아버지 정도는 아니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 역시 나에게는 인생 숙제였다. 그분들 역시 어머니와 나에게 고통을 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할아버지 할머니는 한 때 어머니와 나를 버리려고 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결혼식만 올렸을 뿐 오래도록 혼인 신고를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혼인신고를 요청했지만 아버지와 조부모님은 거절하였다고 한다.
30대 후반에 나는 아버지의 막내 외삼촌인 점휴 할아버지와 미국에서 함께 여행을 한 적이 있다. 그때 점휴 할아버지를 통해 어머니의 혼인신고가 늦어진 이유를 알게 되었다. 혼인신고를 미룬 데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책임도 있었다. 아버지의 주요 조언자였던 점휴 할아버지는 조카인 아버지를 나무랐다. 그는 아버지에게 조언을 하였고, 아버지는 그의 의견을 따랐다.
아버지의 인생을 어둡게 한 주요 원인은 바로 아버지 자신에게 있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그런 아버지에게 동조하거나 그대로 방치하였다. 부모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다. 나는 늘 마음 깊은 곳에서 아버지와 할아버지 할머니의 도덕적 책임을 묻고 있었다. 분노를 가슴에 안고. 나는 어머니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한 자연인으로서의 아버지는 잘 생겼다. 말도 훌륭하였다. 한 무리를 이끌만한 판단력과 통찰력도 지녔다. 여러 가지 복을 두루두루 갖고 태어난 운이 좋은 사내였다. 그러나 절제력 부족, 그릇된 가치관, 주변인의 신뢰 상실, 불운이 겹쳐 그의 삶은 순탄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았다. 가족에게는 무책임하였다. 결정적으로 그는 자기 자신에게 불성실하였다.
어떤 훌륭한 꿈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잘못을 저질렀다면 용서받을 수 있다. 가족과 동고동락(同苦同樂)하는 가운데 불가피하게 가족들의 희생을 막지 못하였다면 위로받았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설령 내게 더 힘든 세월이 주어졌을지라도 미움이 적었거나 존경했을 수도 있다. 그는 그렇지 못한 사람이었다.
자연 나이로 계산하면, 나는 예순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보다 나이를 훨씬 더 먹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를 향한 분노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이십 대 중반 이후 스스로 서게 되면서 그에게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게 되었다. 기대가 없으니 분노도 약해졌다. 그의 그늘을 벗어난 것이다.
정신적으로 그는 더 이상 내게 아버지가 아니다. 법률적으로는 부자관계요, 관습적으로는 혈연관계이지만, 마음의 차원에서 볼 때, 그는 내 세상을 찾아온 한 자연인일 뿐이다. 그가 작은 존재로 여겨졌을 때 그에 대한 미움은 거의 사라졌다. 한 자연인으로서의 아버지가 초라하고 가여운 사내로 보이는 순간, 나는 어른이 되었다. 나 자신이 나의 아버지가 되었다.
만약 그가 지금 내 앞에 나타난다면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 왜 그렇게 살았느냐고 묻지 않을 것 같다. 그는 그냥 그렇게 산 것이다. 그는 자신의 세상을 살아간 것이다. 혼란스럽고 고단하게 살았던 그를 말없이 바라볼 것 같다.
이런 상상은 모두 내 마음의 일이다. 혈연의 틀을 내려놓음으로써 나는 나를 괴롭히던 무거운 쇠사슬을 풀었다. 자유로워졌다.
‘내가 오래도록 붙들고 씨름한 것 역시 아버지의 그림자가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은 나를 더 자유롭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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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연히 이 세상에 나왔다.
살아야 할 정해진 이유가 없다.
우연히 내게 주어진 삶이지만
마치 내가 선택한 것처럼
내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누구나 자신의 짐을 지고 간다.
자신의 삶을 온전히
책임지고 견디며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