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내 세상은 하나의 카페
85년 2월초 이른 아침, 하늘이 맑았다. 거리에는 밤새 내린 눈이 쌓여 있었다. 바람은 차가웠다. 버스에는 손님이 별로 없었다. 버스가 백양사 정류장에 도착할 무렵에는 우리 둘만 남았다. 차에서 내려 백양사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가게들이 문을 열고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가게가 많지 않고 관광객도 없어 거리는 조용하였다. 일주문을 지나자 우람한 늙은 나목(裸木)들이 가지에 눈을 얹은 채 양옆으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숲에서 가끔 불어오는 잔바람에 작고 하얀 눈가루가 햇살을 받아 반짝이며 공중으로 흩어졌다. 우리 둘은 발길이 드문 눈길을 조심스럽게 걸었다. 천천히 절로 올라갔다.
이 선생은 청회색의 털모자를 썼다. 어두운 갈색 머플러를 목에 두르고 베이지색 자켓을 입었다. 모자와 하얀 계란형 얼굴에 긴 머리가 잘 어울렸다. 둘이 나누는 대화는 단순했다.
“학교생활 어떠세요?”
“조금 힘들어요.”
“가장 힘든 것이 무엇이죠?”
“수업준비요.”
이 선생은 나의 질문에 짧게 대답만 할 뿐, 나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내가 이야기를 하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어쩌다 눈길이 마주치면 어색한 듯 곧바로 시선을 정면으로 돌려 하늘 쪽을 향하였다.
멀리 겨울 햇살을 받아 붉게 물든 백학봉 암벽이 자태를 드러냈다. 이 선생의 눈이 커졌다. 가벼운 탄성을 냈다. 커다란 암벽과 파란 하늘이 대조를 이루어 하늘은 더 파랗게 암벽은 더 붉게 보였다.
“여기 와 보신 적 있으세요?”
“아니요. 처음이어요.”
절이 가까워지자 파란 하늘이 더 넓게 열렸다. 작은 연못을 내려다보고 있는 쌍계루를 지나 주인처럼 의젓하게 앉아있는 대웅전에 이르렀다. 눈이 내린 마당에는 햇살이 가득하였다. 긴 응달 길에서 벗어나 바람도 없고 햇볕이 가득한 곳으로 온 것이다. 추운 곳에서 따뜻한 곳으로 온 탓인지 이 선생의 볼이 붉게 물들었다. 웃음이 있는 듯 없는 듯 편하고 밝은 표정으로 이곳저곳을 호기심 있게 살피는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시간이 좀 지나자 절을 찾는 사람들이 점점 늘었다. 절 구경을 다 마친 우리는 다시 길을 내려왔다. 백양사를 떠나 시내로 나오는 버스에 올랐다. 이 선생이 창가에 앉고 나는 통로 쪽에 앉았다. 바깥 날씨가 차고 손님이 적은 탓인지 차의 실내는 쌀쌀하였다. 유리창에는 성에가 가득하여 안에서 밖을 내다보기 힘들었다. 이 선생이 차창 밖을 볼 수 있도록 내가 유리창에 낀 성에를 박박 문질러 닦아 주었다. 이 선생이 입술을 오므리며 미소 지었다.
당시 우리 사이는 그냥 아는 사람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내가 그녀에게 ‘호감이 있다.’는 태도를 보였다면, 그녀는 ‘싫지 않다.’는 정도의 반응만을 보였다. 그녀가 허용하는 접근 범위를 넘어서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불에 데어 본 아이가 불을 대하듯 조심스러웠다. 서로의 관계가 진지해지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그녀가 나와 함께 있는 동안 즐거워하고 편안해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그녀의 기쁨은 곧 나의 기쁨이었다. 그녀의 뜻 모를 미소가 나를 설레게 했다.
그러나 내 기쁨이 곧 그녀의 기쁨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속마음을 알 길이 없었고 또 자세히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내가 그녀의 마음을 간섭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와의 만남을 거부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것이 내가 상처 받지 않는 길이었고, 그녀가 상처 받지 않는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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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세상은 하나의 카페
어떤 사람은 내 곁에 앉고
어떤 사람은 입구 쪽에 선다.
가까이 오는 사람도 있고
떠나는 사람도 있다.
오는 사람 막기 어렵고
가는 사람 잡기 힘들다.
언젠가는 헤어질 우리
늘 이별을 준비해야 한다.
아름다운 이별 준비는
아낌없이 사랑하는 것
카페에서 내가 할 일은
오고가는 인연들을 보살피는 것
사랑은 내가 살아갈 이유이고
후회 없는 삶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