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사랑은 주는 것이다.
곽 원장은 나의 고등학교 동창이다. 동창이었지만 회갑 기념 동창회에서 처음 만났다. 여수 경도에 모인 백여 명의 친구들이 총무가 배정해 준 방에서 자게 되었는데, 나는 대여섯 명의 친구들과 한 방을 쓰게 되었다. 곽 원장은 그중 한 명이었다. 신수가 훤해 보이는 사람도 있었지만, 회갑이 된 만큼 대부분이 초로(初老)의 얼굴이었다. 똑똑한 친구들인지라 대체로 이야기를 잘하였다. 재미있게 들었다. 그중에서도 곽 원장의 이야기는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는 술을 좋아하고 또 많이 마셨다. 나중에는 간이 망가졌으며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다행히 가족들이 정성으로 보살펴 간신이 목숨을 건졌다. 50세 무렵에 딴 세상으로 가려다 가까스로 멈춘 것이다. 이야기가 여기에서 끝났다면 기억에서 희미해졌을 것이다.
병에서 회복되자 그는 기존에 살던 방식과는 전혀 다르게 살기로 하였다. 진료는 오전 8시 30분에 시작하여 오후 1시에 종료하였다. 남은 시간에는 진료 외에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하기로 하였다. 당연하게 간호사들도 그와 동일한 시간 패턴을 갖게 되었다.
무절제하고 방만한 생활을 하다가 죽을 고비를 맞고, 위기를 넘긴 뒤에는 가치관을 바꾸고, 완전히 새롭게 산다는 이야기는 흔한 형식이면서도 언제나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는 돈 욕심을 줄이고, 즐겁게 살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튿날 일정이 끝나자마자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더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다.
여수에서의 동창 모임이 끝난 뒤, 총무가 카카오톡에 동창 단체방을 만들었다. 거기에 곽 원장이 가끔 자기 사생활을 글로 써서 올렸다. 통찰력과 유머가 있었다. 자신의 엉뚱했던 잘못을 스스럼없이 드러냈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죽음에 가까이 가본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내공을 그에게서 느꼈다.
그는 넓은 공터에서 개들과 어울리고 밥을 주며 함께 지내는 사진도 단체방에 올리곤 하였다. 그 개들은 따로 산 것이 아니었다. 남들이 내다 버린 개들이었다. 주인 없는 개들을 데려다가 개 아빠가 되어 돌보는 것이었다. 건강하지 못한 개들도 정성으로 보살피는 것 같았다.
그의 글을 읽고 사진을 보면서 매우 따뜻한 심성을 가진 사람일 것이라고 짐작하였다. 어떤 때는 그와 함께 개에게 먹이를 주면서 대화하고 싶었다. 그냥 마음이 통하고 편할 것 같았다. 하지만 사는 곳이 달라 불가능하였다. 나는 서울에 그는 전주에 사는 까닭에 쉽게 만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순천에서 살던 딸에게 갈 일이 생겼다. 우리 부부는 순천에 가는 길에 곽 원장 병원을 잠시 들르기로 하였다. 미리 전화를 했더니 기꺼이 약속을 잡아 주었다. 그날 오전 11시경 전주 외곽지역에 있는 그의 개인병원에 들르게 되었다.
도심지를 통과한 후 큰길에서 좁은 길로 접어들었다. 낡은 정도가 심한 주택들이 나타났다. 길가 가게들 간판들도 헐고 낡았다. 산비탈에는 1960년대에 지어진 것 같은 판자 집들이 있었다. 지붕이나 벽은 검게 썩어가고 있었으며, 초록 이끼도 제거되지 않은 채 붙어 있었다. 마치 시간 여행을 온 것 같았다.
병원은 작은 3층 건물의 2층에 있었다. 1층에는 조그만 가게와 약국이 있고, 3층은 비어 있는지 실내가 어두웠다. 병원 건물 역시 오래되어 보였다. 거리에는 사람도 차량도 뜸하여 대체로 조용하였다. 병원에도 손님이 별로 없을 것 같았다. 곽 원장이 잠시 짬을 내어 우리 부부와 차 한 잔을 마셔도 될 성싶었다. 그러나 우리 부부의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병원 대기석에는 빈자리가 없었다. 심지어 선 채로 진료를 대기하는 중년 남성도 있었던 것 같다. 얼추 20여 명의 나이 많은 노인들이 앉아 있었다. 노인 특유의 주름지고 무표정한 얼굴에 구부정한 자세를 한 채 빽빽하게 모여 있었다. 마치 선생님이 나눠줄 사탕을 기다리는 어린 학생들처럼 얌전하게 앉아 있었다.
병원 문을 열고 들어서자 수많은 눈들이 일제히 우리 부부를 향하였다. 마치 ‘어이 젊은 사람들, 당신들 어디에서 왔소?’라고 묻는 것 같았다. 우리 부부는 잠시 당황하였다. 곽 원장을 쉽게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손님이 많다니!
서둘러 간호사를 불렀다. 내 이름을 원장님께 전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리고 얼른 다시 나왔다. 마침 1층에서 2층으로 올라오는 계단 중간에는 의자가 있었다. 아내와 함께 의자가 있는 쪽으로 내려갔다. 계단 벽에는 안내판이 있었다. 하늘색 바탕에 희고 노란색의 큼직한 글자가 궁서체로 박혀 있었다. 단번에 눈에 띄었다. 안내문이 인상적이었다.
< 안내문 >
몸이 아플 때
마음이 아플 때
본인이나 가족 친지의 건강이 걱정될 때
가정 형편이 어려워 병원에 오시기 힘들 때
어느 병원, 어떤 의사, 어떤 약국으로 가야 할지 모를 때
입원이나 수술을 해야 하는데 상담을 하시고 싶으실 때
첫 번째 항목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왜 써 놓았을까? 여기가 몸을 치료하는 병원이라는 점을 전제하고 다른 말을 한다는 셈법이 엿보였다. 나머지 항목은 몸의 치료와는 큰 상관이 없는 내용이었다.
‘이런 안내문을 본 적이 있었던가?’
이전에 다른 어디에서도 이런 안내문을 본 적이 없었다.
안내문을 읽고 있을 때 간호사가 문을 열고 나왔다. 우리 부부를 찾았다. 진료실로 들어갈 때 노인들의 시선이 느껴져 쑥스러웠다. 좁디좁은 원장실에도 이미 서너 명의 노인들이 진료 대기 중이었다. 곽 원장이 손님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러나 대기 중인 손님들이 많아 도저히 오래 머무르면 안 될 것 같았다. 몇 마디 안부만 주고받은 뒤 병원 문을 나섰다.
‘저 젊은 친구들, 무슨 일로 왔다 가지?’
노인들의 시선이 우리 꽁무니를 따라오는 것 같았다.
저녁때 곽 원장과 통화를 하였다. 그런 안내문을 쓴 사연을 물었다.
곽 원장 병원이 있는 지역은 가난한 노인들과 탈북민들이 주로 살았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혼자 사는 노인도 많았다. 설령 자녀가 있어도 보살핌을 받을 수 없는 처지의 사람들이 있다고 하였다. 그의 평소 지론은 ‘안 아픈 게 최고’다. 그런데 이런저런 사정으로 아파도 어떻게 치료받아야 할지를 모르는 노인들에게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어야 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는 환자들의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치료해 주는 의사였다. 손님들은 몸이 아플 때뿐만 아니라, 마음이 아플 때도 그를 찾는 것 같았다. 짐작하건대 대기실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노인들 중에는 마음을 치료받고 싶어서, 또는 위안을 받고 싶어서 온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나이 먹은 ‘늙은 자녀들’을 정성으로 돌보는 ‘젊은 아비’였다.
내 생각에 그는 그 동네 사람들의 의지처이고 위로이고 희망이었다. 그는 진정한 사랑꾼이고, 그래서 참 행복한 사람이다. 따뜻하고 아름다운 사람이다. 그를 생각하면 차가운 세상에서도 온기를 느낄 수 있다. 행복은 전염된다. 곽병찬 원장이 나의 친구여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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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선한 마음을 건네 ‘주는’ 것이다.
상대의 마음을 받아 ‘주는’ 것이다.
사랑은 거래가 아니다.
주는 것 자체가 기쁨인 것이 사랑이다.
마음과 시간과 그 모든 것을
주면서 기쁜 것이 사랑이다.
꽃은 벌에게 꿀을 주고
어미 소는 송아지에게 젖을 준다.
주려고 해도 주지 못한 꽃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주고 싶어도 주지 못한 어미 소는
병들어 아프다.
사랑을 많이 주는 사람은
진정한 부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