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친절이 종교다.
혼자 사는 낯선 아주머니 집에서 간호를 받는 일은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 몸을 꿈쩍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누운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나를 보살폈다. 대소변을 처리해 주고 밥과 한약을 먹여 주었다. 부끄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가 “미안합니다.”라고 하면, 그녀는 짧게 “괜찮아요.”라고 위로해 주었다.
1980년 5월 23일 당시, 내게는 광주시의 혼란과 공포를 이길 용기가 없었다. 신념도 부족하고 비겁했다. 아침 일찍 광천동을 떠나 어등산을 넘었다. 노안 금성산에 있는 외갓집으로 가기로 하였다. 가는 중간에 어느 농부의 집에서 물을 얻어먹었다. 그들은 내게 경계심을 보였다. 불편을 준 것 같아 미안하였다. 서둘러 다시 길을 나섰다. 군인들이 지키는 길목을 피하여 움직였다. 삼거동을 경유하여 걸었다. 저녁때가 되어 외갓집에 도착하였다.
산에서는 외부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라디오가 있었지만 광주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 광주는 철저하게 고립되어 있었다. 산에 있어도 마음은 온통 광주에 가 있었다. 멀리 무등산이 말없이 앉아 있었다. 광주 사정이 궁금하여 견딜 수 없었다. 28일 이른 아침, 밥을 먹은 뒤 광주로 향하였다.
평동을 지나 송정교 근처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십여 명의 군인들이 나타났다. 총으로 협박하였다. 장교 앞으로 끌려갔다. 가방에는 일기장이 있었다. 장교는 그걸 통해 나의 신분과 생각을 알아냈다.
“이런 빨갱이 새끼, 이런 개새끼, 죽여 버려!”
사병들이 온갖 욕설을 퍼부으면서 몽둥이로 때렸다. 매를 맞아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하였다. 내가 쓰러져 있는 상황에서 장교는 말없이 계속 일기장을 뒤적였다. 그리고 대학시절 동안 쓴 두툼한 일기장을 모두 박박 찢어 버렸다. 건조한 목소리로 내게 내뱉듯이 한 마디를 하였다.
“일기장은 없었던 걸로 한다.”
간단하게 내 신분을 기록한 뒤 나를 지프차에 실어 경찰서로 보냈다.
이미 나 스스로의 힘으로는 거동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보호할 사람 연락처를 묻는 경찰에게 외숙부의 전화번호를 알려 주었다. 몇 시간 뒤 외숙부가 달려왔다. 표정이 일그러졌다. 외숙부가 나갔다가 얼마 후 어떤 아주머니와 함께 경찰서로 들어섰다. 외숙부와 그녀는 경찰서 근처의 작고 좁은 방으로 나를 옮겼다. 그녀 혼자 사는 집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녀는 외숙부의 정부(情婦)였다.
당시 외숙부는 무면허로 의료행위를 하면서 살림을 꾸리고 있었다. 한약을 다루었는데, 주로 남광주역 근처의 동춘당 한약방에서 약재를 공급받았다. 약방 주인은 외숙부가 만든 약방문(藥方文)에 따라 약재(藥材)의 무게를 재가면서 정사각형의 하얗고 네모난 종이에 약재를 올린 뒤, 그것을 접어 약봉지를 만드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그녀는 외숙부의 약 심부름도 하고 손님도 관리하면서 비서 역할을 하고 있었다.
낡은 나무 격자 유리창을 통해 간신히 빛이 들어오는 좁은 방에서 외숙부는 연신 담배를 피우면서 약방문을 만들었다. 내 몸 상태를 살필 때마다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녀가 약방문을 들고 떠난 뒤에도 담배를 서너 대 더 피운 뒤에 외숙부가 자리를 떴다.
“너 여기서 몸이 다 나을 때까지 그냥 지내라.”
여기가 어디인지, 그 아주머니가 누구인지 묻지 않았다. 단지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그들의 관계를 짐작할 뿐이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궂은일을 감당하였다. 나는 그냥 몸을 맡겼다. 거의 말을 걸지 않았다. 그녀도 꼭 필요한 말만 하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외출을 하였는데, 나 때문에 더 바빠진 것 같았다. 그녀는 나를 마치 아들이나 조카 대하듯 편하게 해 주었다. 일주일쯤 지나서 그녀에게 부탁했다. 보고 싶은 사람이 있으니 연락을 해 달라고. 덕분에 같은 학과의 기석 형을 만날 수 있었다. 방으로 들어와 나를 본 형은 신음소리를 냈다. 눈시울이 금방 붉어졌다.
그녀의 따뜻한 보살핌 덕에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법성의 작은어머니에게로 갔다. 안정적으로 요양할 수 있는 곳은 작은어머니가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같은 마을에 사는 큰 고모가 소주병에 진한 갈색 빛깔의 어떤 액체를 담아 왔다. 내게 마시라고 건넸다. 냄새가 역겨워 견딜 수 없었다. 코를 막고 얼른 마시라고 성화였지만 구역질이 나서 도저히 마실 수 없었다.
“고모, 이걸 어떻게 마시라는 거야. 지독한 냄새 때문에 가까이하기도 힘들어. 도대체 이게 뭐야?”
“이게 뭐냐면, 청강수야. 잘 삭힌 똥물인데, 매 맞은 데 특효약이다.”
6.25 전쟁 때 매를 많이 맞은 고모부가 그 청강수를 마시고 회복하였다는 말을 덧붙였다. 더더욱 마시기 싫어 손사래를 치면서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옆에 서 있던 작은어머니가 그 꼴을 보고 크게 웃었다.
그 후 송정리를 지나갈 때면 그 아주머니를 찾아가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만 있었지 실제로는 그 집에 가지 않았다. 세월이 조금 흐른 후에는 그녀가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누구에게 묻지도 못하였다. 아버지와 어머니, 외숙부와 외숙모의 관계를 생각하면, 내가 그녀에게 어떻게 처신해야 옳은 것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녀에게 고마움을 전하면 외숙모에게 죄를 짓는 것은 아닐까? 마음이 복잡하였다.
그래도 그 아주머니가 내게 베풀어 주신 지극한 친절을 생각하면, 반드시 거기에 가서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전했어야 했다. 속 좁고 어리석어 그분의 따뜻한 친절에 감사할 기회를 잃었다. 참으로 후회스럽다. 늦게나마 그분의 행복을 진심으로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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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이 종교다.”
법정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친절은 99%의 노력에
1%의 힘을 더해주는 것이다.
99%의 힘으로 움직이지 않던 바퀴가
1%를 더하여 100%의 힘이 될 때 움직일 수 있다.
1%의 힘은 비록 작지만
1%의 힘을 더해주는 일은 아무나 하지 못한다.
친절한 마음을 내는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하지 못한다.
마음이 열린 자만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