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아이에게 엄마가 일하는 곳을 보여주자.
몇 살 때인지 정확하게 모른다. 아주 어렸을 때의 일이었다는 것만 기억한다.
금용 외삼촌이 나를 등에 업었다. 나는 양손으로 삼촌의 목을 잡고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등에 기댔다. 백운동 언덕에 있던 집을 출발하였다. 외삼촌은 큰길을 지나고 철길을 따라 오래 걸었다. 삼촌 외에도 일행이 몇 명 더 있었다. 아마 삼촌의 친구들이었을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일행은 어떤 낯선 건물로 들어갔다. 외벽은 검은색의 긴 판자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외삼촌이 나를 등에서 내려주었다. 삼촌을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철커덕거리는 기계음이 요란했다. 실내는 밝았다. 검은 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고 흰머릿수건을 두른 아주머니들이 시끄러운 기계음 속에서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모자를 쓴 아저씨들은 무언가를 나르는 것 같았다.
그 아주머니들 사이에서 이모가 “종구야!”하고 나를 불렀다. 이어서 하얗고 동그란 얼굴에 흰 이를 가득 드러내며 엄마가 이모 뒤를 따라 나왔다. “엄마!”하고 외치면서 엄마에게 달려갔다. 엄마가 나를 안았다. 어른들이 아주 크게 웃었다. 나는 마냥 신이 났었다.
엄마 무릎에 앉았다. 누군가가 맑은 물이 가득 담긴 큰 병을 갖다 주었다. 작은 공기방울들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 물은 입을 톡 쏘았고 달콤했다. 너무 좋았다. 그것은 사이다였다. 엄마 품에 안긴 채 잔뜩 마셨다. 다시 백운동 집으로 돌아올 때는 어떻게 왔는지 전혀 기억에 없다.
어느 날 외할머니에게 그때 일을 물어보았다.
“할머니, 옛날 백운동 살 때, 엄마랑 이모가 사이다 공장에 다녔었지요? 나 거기 가본 기억 있어요.”
“그랬었지. 그때 네가 왜 그 사이다 공장을 가게 되었는지 모르지?”
“네, 잘 몰라요. 그냥 엄마랑 이모가 일하는 곳이어서 간 것 아니었어요? 다른 무슨 사정이 있었나요?”
당시에 엄마와 이모는 방림동에 있던 사이다 공장을 다녔다. 두 사람은 새벽에 출근하고 밤이 되어 귀가를 하였다. 그런 상황이 계속되자 나에게 문제가 생겼다. 밥을 잘 먹지 않았다. 맥이 풀려 지냈다고 한다. 시름시름 앓는 나를 보면서 외할머니는 엄마를 보지 못해 생긴 병이라고 진단하였다. 아이에게 제 어미를 보여 주어야 병이 나을 것 같다고 생각하였다.
할머니는 둘째 외삼촌을 시켜 나를 엄마에게 데려가게 했다. 바로 그 공장에서 나는 엄마 품에 안겨 사이다를 맛있게 먹었던 것이다. 엄마의 일터에 다녀온 뒤로는 엄마가 보이지 않아도 밥을 잘 먹고 잘 놀았다고 한다.
외할머니의 통찰력과 따뜻한 감수성이 읽히는 그 사건은 나에게 소중한 유산이 되었다. 딸이 태어난 뒤 주말이면 종종 근무처로 데리고 가서 함께 놀았다. 아내가 근무하는 곳에도 데려갔다. 엄마 아빠가 눈앞에 보이지 않아도 엄마 아빠가 일하는 장소를 기억하며 정서적인 안정을 잃지 않게 한 것이다. 자녀를 둔 친구나 주변 동료 또 후배들에게도 자녀와 함께 근무처를 방문해 보도록 권장하곤 했다. 외할머니가 준 선물을 다른 사람에게도 나누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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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누구인지 모른 채
사랑할 수 있을까?
그가 원하는 것을 모른 채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까?
그에 대한 무지(無知)는
상처를 줄 수 있다.
그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 말과 행동은
폭력이 될 수 있다.
그를 바르게 알려거든
그의 세상으로 들어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