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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걍보리 Apr 25. 2023

너는 내 세상이다

37. 아이에게도 사과해야 한다.

  영미(가명) 엄마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비스듬하게 숙이며 입을 꼭 다물었다. 얼굴 위로 눈물이 번졌다. 내가 화장지를 내밀었다. 그녀의 호흡이 조금 거칠고 불규칙했다. 복잡한 감정을 억누르려고 애를 쓰지만 추스르기 힘든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판단이 잘 서지 않는 듯 동그랗고 작은 턱을 시계추처럼 흔들었다. 몇 분 동안 침묵이 흘렀다. 내가 먼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여기까지 오시는 것도 힘드셨지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말을 재촉하지 않았다. 긴 한숨 끝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제가 아이의 일기장을 본 것이 화근이었어요. 아이 방을 청소하면서 책상을 정리하다가 일기장을 발견한 것이죠.”

  방 청소만 했다면, 책상정리만 했다면, 부녀 사이에 갈등을 없었을 것이다. 엄마가 여고 2학년 딸의 사생활을 존중해 주지 않고 호기심을 못 이겨 딸의 일기장을 엿본 것이 문제가 되었다.

  “일기장에는 제가 용납하기 어려운 내용이 있었어요. 그게 무슨 자랑이라고.”

  엄마는 딸에 대한 실망감과 분노를 드러내었다. 부정적인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녀의 이야기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내가 물었다.  

  “어머니는 그 일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단 말이죠? 그런데 궁금해요. 그것이 정말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일까요?”

  영미 엄마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나의 반문(反問)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그 일이 잘못된 것이 아니란 말인가? 얼른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보수적인 종교적 전통 속에서 살아온 그녀의 가치기준을 흔드는 반문이었기 때문이다. 잠시 뜸을 들인 뒤 내가 말을 이었다.

  “엄마에게는 그 일이 나쁜 짓으로 보이겠지요. 하지만 영미는 그 일을 소중한 추억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자신이 좋아하는 남학생과 안전하게 관계를 가졌고, 또 언젠가는 체험해야 할 것을 체험하였으니까요.”

  엄마의 수용 여부를 떠나서 이미 벌어진 일이다. 엄마는 딸을 야단쳤고 딸은 엄마의 무례에 항의했다. 거친 말이 오고 가면서 화를 참지 못한 엄마는 딸에게 절대로 해서는 안 될 말을 하였다. 

  “너는 걸레야!”

  딸은 모욕감에 몸서리쳤다. 모욕은 지옥이다. 부모의 자녀에 대한 부정적인 규정은 자녀를 파괴적인 상황으로 몰 수 있다. 자신을 실제로 낮은 수준의 정체성을 지닌 존재로 이해할 수 있다. 자신의 유능함과 성실성을 믿지 못하여 다른 가능성을 미리 닫아버릴 수도 있다. 반항이 심하면 부모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 자발적으로 타락해 버릴 수도 있다. 어떤 경우이건 모욕은 한 사람의 인격을 파괴하고 관계를 망가뜨린다. 

  딸은 여행 가방에 갈아입을 옷 몇 가지를 주섬주섬 싸들고 집을 나갔다. 엄마는 자신이 한 말을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거예요?”

  영미 엄마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미처 정리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묻는 형식을 취하면서 그녀 스스로 마음을 정리해 볼 기회를 주려고 했다.

  “따님과 화해하고 싶지 않으세요?”

  고개를 끄덕였다. 야단을 친 것도 딸이 바르게 살라고 가르치고 싶어서 그런 것이고, 내쫓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니지 않은가?

  “어떻게 해야 하죠?”

  영미 엄마가 화해의 길을 찾으려고 했다. 내가 그 말을 받아 되물었다.

  “어머니 생각에는 어떻게 하면 좋을 것 같아요?”

  한참을 생각하던 엄마가 말했다.

  “힘들지만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할 것 같아요.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엄마의 맘속에는 있지만, 꺼내기 힘들 것 같은 말을 내가 말해 보았다.

  “사생활을 엿본 무례함과 과도한 모욕에 대해 사과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부모도 실수할 수 있는 법이니까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시하였다. 

  “그래요. 부모도 실수할 수 있는 법이죠.”

  내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진정으로 화해하기 위해서는 매우 어려운 일을 하나 더 하셔야 합니다.”

  뜸을 들이면서 영미 엄마가 마음을 다질 시간을 주었다. 

  “따님의 행위를 ‘나쁜 짓’이 아닌 ‘아름다운 추억’으로 인정해 주셔야 합니다. 정말 어려운 일인데, 어머니가 하실 수 있을까요?”

  그녀는 난감해하였다. 그 나쁜 짓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여기라고? 오래된 가치관을 당장에 바꾸라고? 하지만 딸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힘든 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사랑이 아닐까? 인정하는 척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행동이 바뀌면, 그 행동을 따라 의식도 변한다. 그녀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  

   

그가 그답게 살게 하자.

그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자.  

   

내 뜻이 아닌 

그의 뜻대로 살게 하자.     


그의 말에 귀 기울이자.

그가 사는 세상을 함께 여행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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