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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걍보리 Apr 23. 2023

너는 내 세상이다

36. 사랑은 약속이다.

  87년 9월. 아내가 임신을 한 것 같다고 말하였다. 생리가 멈췄단다. 내 감정은 복잡해졌다. 아내에게 어떤 태도를 보여 주어야 할지 얼른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래 알았어.”

  나의 대답은 무성의하였다. 마주 보고 웃거나 기쁜 표정을 지어야 정상일 것 같은데 도무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나의 어정쩡한 태도는 내 마음에도 들지 않았다. 아내에게도 미안했다. 몇 주 뒤에 유산기가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마땅하게 해 줄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뭔가 내게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유산기가 멈추고 정상적으로 착상된 것 같다는 말을 들었을 때 역시 무거운 기분에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 당시에 나는 ‘세상은 괴로운 곳’이라는 생각을 강하게 하고 있었다. 

  ‘이렇게 살기 힘든 세상에서 왜 아이가 살게 해야 하지?’  

  ‘아이를 낳는 것은 아이에게 죄를 짓는 것이 아닐까?’ 

  사춘기 이후 진지하게 자살을 고려해 본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결혼을 한 후에도 여전히 내면 깊숙한 곳에서는 늘 자살 충동이 꿈틀거렸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세상은 살만한 곳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떻게 아이를 이런 우울한 세상으로 초대할 수 있겠는가? 

  누군가를 사랑하면서도 그 사람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었다. 결혼을 하고 싶어 하면서도 행복하게 살 자신이 없었다. 이런 모순된 생각이 늘 나를 힘들게 했다. 왜 그랬을까?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내가 함께 사는 정상 가정을 체험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런 것 같았다. 부모의 보살핌 속에서 자란 경험이 없기에 아이를 잘 키울 자신이 없었다. 아빠가 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부부가 되어 다정하게 살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좋은 남편이 될 자신이 없었다. 부부 사이에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풀어야 되는지에 대해서도 알 길이 없었다. 그늘진 과거가 현재의 내 마음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다. 과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생각에 흠칫 놀랐다. 정직하게 내 마음을 살펴보기로 하였다.

  나는 왜 결혼을 했을까? 아내가 좋아서 함께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결혼에는 배우자의 선택을 존중하겠다는 뜻도 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결혼을 하고 아내가 아이를 낳으면 함께 기른다는 약속도 이미 전제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잉태된 생명 역시 이미 자신의 권리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닐까? 태아의 운명을 함부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내게 있기나 한 것일까? 내게는 아빠로서 책임을 다 해야 하는 의무만 있는 것이 아닐까? 

  자문자답(自問自答) 과정에서 마음이 정리되는 것 같았다. 나는 새로 태어날 아이의 아빠가 되기로, 온전히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그래. 잉태되는 순간, 태아는 벌써 나를 아빠로 만든 거야.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성실하게 아빠 역할을 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이지.’

  이런 생각을 했던 날 밤, 잠자고 있는 아내의 배에 손을 얹었다. 아내와 함께 잠자고 있을 태아에게 마음속으로 약속하였다.

  ‘나는 네가 아들이건 딸이건, 정상아건 기형아건, 영재건 저능아건 가리지 않겠어. 네 스스로 서는 그날까지, 네 곁을 지킬 거야.’


  한 아이가 두 남녀가 사는 세상을 찾아왔다. 아이는 한 사내를 ‘아빠’로 만들었다. 한 여자를 ‘엄마’로 만들었다. 아이는 우리에게 부모 세상을 열어 보여 주었다. 아이는 남자와 여자 사이로 들어와 아빠 엄마 자녀 세 사람이 사는 세상을 만들었다. 아이가 가족원이 되려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환영하는 것이 좋을까? 나는 후자를 선택하였다. 기꺼이 환영하기로 마음먹었다. 우리들에게 어떤 상황이 전개되건, 당당하게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였다. 

  누군가를 ‘무조건적으로 영원히 사랑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아와의 사랑의 약속’은 나를 이전과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다. ‘사랑의 약속’과 ‘결단의 힘’을 느꼈다. 아내는 내 인생의 행운(幸運)이었고, 딸은 내 인생의 축복(祝福)이었다. 나는 딸을 키우면서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체득했다.  

   

********** 

    

약속은 ‘자기 구속’의 언어이다.

자신의 말로 자신의 행동을 규정한다. 

    

사랑은 약속이다.  

   

어떤 경우에도 네 곁에 서겠다는 약속은

너를 내 운명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결단은

‘영원한 사랑’을 가능하게 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다는 뜻이다.

     

사랑을 약속한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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