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허물이 없는 사람은 없다.
거지꼴의 내 모습을 고모 외의 다른 선생님이나 학생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교문 근처를 서성거렸다. 마침 외출하고 돌아오는 학생이 있어서 불렀다.
“학생, 교무실에 가서 이런 이름을 가진 선생님에게 교문에서 조카가 기다리고 있다고 말 좀 전해 줄래?”
더러운 옷을 입고 있는 거지 같은 낯선 남자가 자기 학교 선생님의 이름을 대자 학생은 뭔가 의심스럽고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 이름은 무엇이며 그 선생님의 조카가 분명하다고 말했다. 학생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여 심부름 수락 의사를 표시하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멀리 학교 현관 앞으로 고모가 나타났다.
교문과 학교 현관 사이는 멀었다. 두 지점 사이에는 태양이 내리쬐는 널따란 운동장이 펼쳐져 있었다. 막내 고모가 오른손을 크게 흔들었다. 학교 현관 쪽으로 빨리 오라는 손짓이었다. 왼손에는 수업 교재를 들고 있었다. 나 때문에 수업을 해야 할 교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마음이 바빠 보였다. 나는 고개를 도리질하는 동시에 오른손 바닥을 빠른 속도로 흔들었다. 그곳으로 갈 수 없다는 표시를 하였다. 고모는 짜증이 난 것 같았다. 내가 가지 않자 할 수 없이 운동장가의 등굣길을 걸어 교문까지 나왔다. 나를 보자마자 고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 미쳤냐? 이게 무슨 꼴이야!”
헝클어진 머리에 덥수룩한 수염, 더럽고 때가 찌든 옷차림새는 산뜻한 여선생님의 모습과 완전한 대조를 이루었다. 나는 웃고 있었고, 고모는 놀란 표정이었다. 갑자기 고모가 바빠졌다. 교실에서 선생님을 기다리는 학생들이 생각난 것일까? 자신이 자취하는 집의 위치를 서둘러 알려주었다. 몸도 씻고 음식도 챙겨 먹으라고 일러 준 뒤 총총걸음으로 교실로 향하였다.
그 당시 나는 내가 싫었다. 내가 아버지와 조부모의 핏줄이라는 사실이 싫었다. 몸속의 장기(臟器)를 버릴 수 없듯이, 그들이 나의 뿌리라는 것이 절망스러웠다. 완전한 독립을 못했기에 때로는 교활하게 굴면서 그들의 협조를 기대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짜증이 났다. 나는 나를 파괴하고 싶었다. 자살 충동은 늘 내 곁을 떠돌았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기 전까지는.
내면에서 들끓는 불길은 종종 나를 기행(奇行)으로 몰았다. 어느 날 충동적으로 자취방을 뛰쳐나왔다. 거리에서 자고 구걸해서 밥을 얻어먹었다. 걷고 또 걸었다. 거지꼴이 되었다. 이리저리 헤매다가 막내 고모가 근무하는 학교를 지나가게 되었다. 내 모습에 고모가 황당해한 것이다.
우리는 나이차가 두 살 밖에 나지 않는다. 누나와 동생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지냈다. 아주 어렸을 때는 증조할아버지의 밥상에서 귀엽게 무릎을 꿇고 함께 밥을 먹었다. 학창 시절에는 함께 지낸 시간도 많았다. 평생 동안 한 번도 다툰 적이 없다. 크고 작은 문제를 상의하고 서로 도우면서 살았다. 내 세상을 찾아온 귀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세상에는 고모가 모르는, 알아도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한 지붕 밑에서 지낼 때도, 서로 다른 세상을 살았다는 사실을 고모가 알았을까? 한 겨울에 고모가 따뜻한 안방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자고 있을 때, 나는 연탄불이 없는 냉골의 작은방에서 홀로 떨면서 잤다. 할머니에게는 연탄 값이 아까웠을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겨울이 되면 나는 친구인 한수 집에 가서 지냈다. 한수 어머니는 친구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나를 재워주고 먹여주고 입혀주었다. 그때 나는 이 집 저 집을 헤매면서 산 것이다. 고모가 수학여행을 갈 때 나는 가지 못했다. 나는 어른들의 그런 결정에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았다. 그래 본들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주변 사람들은 내가 왜 거지꼴로 헤맸는지 이해할 수 있었을까? 그들은 종종 나를 괴짜라고 말했다. 그들에게는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내가 살던 세상은 늘 어두웠고 어지럽게 흔들렸다. 나도 나를 예측하기 어려웠다. 그들이 어떻게 그런 내 세상을 알 수 있었겠는가?
입주제 가정교사를 하며 지내던 나는 스물여섯이 되던 해 3월에 무안 해제로 발령을 받았다. 출근할 때 입을 옷과 이불 비키니 옷장 등을 간단하게 마련하였다. 트럭을 빌려 그것들을 싣고 조부모님이 살던 곳을 찾아가 작별인사를 하였다. 그 집에 남아있던 소지품을 챙겼다. 내 흔적을 지우고 싶었다.
‘다시는 돌아오지도 않을 거야. 친족 그 누구도 만나지 않을 거야.’
그날 나는 그런 결심을 하고 있었다. 조부모님에게 사무적으로 작별인사를 하였다. 많지 않은 짐과 책을 차에 싣고 서둘러 떠났다. 트럭에 타려는 나를 할머니가 뒤에서 불렀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살던 세상으로부터 떠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완전히 떠나고 싶었던 것이다. 과거를 다 잊고, 모든 인간관계를 다 버리고, 새로운 출발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할머니가 나의 차가운 태도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
목포 작은아버지로부터 할머니가 적지 않은 상처를 받았다는 말을 들었다. 할머니에게 나는 보살펴준 은혜를 모르는 나쁜 놈이었다. 하지만 친척 중 아무도 내게 그때 왜 그렇게 행동했느냐고 묻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들의 관계가 만든 세상은 어두웠다. 그분들이 어머니와 내게 준 고통은 나에게만 머무르지 않았다. 나의 분노는 다시 그분들에게도 되돌아 흘러갔다. 거절과 반항 형태로. 우리는 깊은 속마음을 나누어 보지 못했다. 서로의 상처를 치유해 줄 만큼 성숙하지도 못했다.
혈연이 아닌 자연인으로서의 할머니를 생각해 본다. 할머니에게도 수줍은 소녀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장남이 성공하면 커다란 행복이 찾아올 것이라는 희망도 있었을 것이다. 할머니는 여러 동생들에게 친절한 큰누나이자 언니였다. 친정조카들에게는 든든하고 좋은 고모였다. 친정 손아래 올케가 암으로 고생할 때, 친정동생이 새 부인을 얻었을 때, 그 상황에서 친정조카들이 마음 붙일 곳이 없었을 때, 그들을 품어주는 사람은 바로 할머니였다. 할머니 조카들은 어려울 때마다 할머니를 찾아왔었다. 자연스럽게 나는 그들과 친하게 되었다.
할머니의 친정조카들은 삼촌 고모 항렬이었지만, 나와 나이 차이가 크지 않아 평생 동안 사이좋게 지냈다. 함께 맛집도 찾고 해외여행도 하였다. 사이좋은 형제처럼 지냈다.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할머니의 조카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맘씨 좋은 고모와 나 사이의 보이지 않는 냉기가 이상해 보였을 것이다. 언젠가 그 까닭을 궁금해하였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사람은 여러 개의 얼굴을 갖고 산다. 조카들에게는 따뜻한 얼굴을 가진 할머니가 내게는 다른 얼굴로 나타난 것이다. 나는 그들이 갖고 있는 자신들의 고모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손상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는 안 될 일이었다.
대개 할머니들은 손자들을 귀여워한다. 그런데 할머니는 내게 그다지 살갑지 않았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결혼을 반대했고, 그래서 며느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 며느리가 낳은 손자가 마뜩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잘 모르겠다.
어느 해에 나와 아내는 법성에서 셋방을 얻어 지내시는 할머니를 만났다. 그날 할머니는 아내에게 낡은 스텐 밥그릇 하나를 주었다.
“네가 종손 며느리임에도 불구하고 줄 것이 스테인리스 그릇 하나밖에 없어 미안하다.”
한 해에도 여러 차례 제사를 지내면서 살았던 할머니는 장차 종손으로서 집안 제사를 지내야 할 우리 부부에게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을 담아 스텐 밥그릇 하나를 준 것이다. 아내는 그 그릇을 할머니가 준 유산으로 보관하고 있다. 할머니의 당부 때문이었을까? 아내는 오래도록 기꺼이 할아버지 할머니와 조상님을 받드는 제사를 지냈다.
나는 늘 양가감정에 시달렸다. 조부모님이 고마우면서도 미웠다. 나는 힘이 없었다. 혈연의 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나만 그랬을까? 아마 아버지나 조부모님의 나에 대한 감정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순종하지 않고 반항하는 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힘들지 않았을까?
서로를 독립된 인격체로 볼 수 없었기에 나는 애증의 덫을 벗어나지 못했다. 가족 구성원 모두가 미숙했던 것이다. 가족을 가족이 아닌 남처럼 여길 수 있어야 했다. 아무도 그렇질 못했다. 지금은 내게 아버지나 조부모님을 편하게 대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하지만 그분들은 이미 내 곁에 안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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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작고 작습니다.
오체투지(五體投地)로 참회합니다.
나의 어두운 그림자를 바라봅니다.
부정할 수 없는 내 모습입니다.
나는 완벽하지도 않고 그럴 수도 없습니다.
겸손으로 교만을 넘어서길 원합니다.
손톱만 한 성취에 취하고 눈이 멀지 않기를 원합니다.
아무도 고통을 피할 수 없습니다.
고통은 지위와 소유의 차이를 넘어섭니다.
고통 속에서 우리는 형제요 자매입니다.
아픔과 슬픔이 없는 삶을 바랄 수 없습니다.
사랑을 통하여 고난을 극복하길 소망할 뿐입니다.
나의 고통 속에서 남의 고통을 보게 하시고
남의 고통 속에서 나의 고통을 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