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추모는 각자의 방식으로
아버지의 장례식 때 어떤 식의 장례방법을 선택할 것인지에 대하여 여러 의견이 있었다. 형제들이 모여 생각을 나누었다. 그 결과 우리는 전통관습에 따라 장례식을 치르되, 각자 자신이 따르는 종교의 추모 방식을 허용하기로 하였다. 아무런 갈등이 없었다. 형제간의 화합이 돌아가신 아버지의 뜻일 거라는데 모두 동의하였기 때문이다.
신부님, 스님, 목사님이 차례차례 장례식장으로 왔다. 각 종교의 방식에 따라 추모를 하였다. 나는 세 가지 방식의 행사에 모두 참석하였다. 추모 의도가 중요하며 형식은 부차적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종교 간의 갈등을 싫어한다. 당연한 말이고 누구나 그렇지 않으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세상에는 종교 간의 갈등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특히 종교권력자들이 그러하다. 어떤 자들은 암암리에 갈등을 일으켜 자기가 소속된 종교 집단의 결속을 강화한다. 앞에서는 신앙을 앞세워 싸움을 부추기고, 뒤에서는 이익을 챙긴다. 한 마디로 성직자의 모습을 한 나쁜 인간들이다.
‘종교전쟁’은 모순된 말이다. 최고의 가르침 때문에,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 때문에, 서로 싸운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지 않은가? 종교집단 간의 전쟁은 실제로는 종교의 탈을 쓰고 이권을 챙기는 ‘탐욕 전쟁’이고 권력다툼이다.
특정 종교단체 소속원이 다른 종교단체를 비난할 때 듣기가 불편하다. 그 점에서 지금의 한국 개신교 문화는 건전하지 못하다. 개신교 신자들의 배타적인 태도는 불쾌하다. 자신들이 어떤 이유를 붙여도 그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배타성은 그들이 따르는 ‘예수의 뜻’을 배신하는 태도다.
자신과 같은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교회에 다니는 가족원이 교회에 안 다니는 다른 가족원을 적대시할 때, 화가 나고 슬프고 무서웠다. 저 산곡의 백합이요 빛나는 샛별인 예수를 위해 십자가의 군병이 된 그가 주변인을 사탄으로 여길 때 괴로웠다. 그가 미워하는 사탄은 바로 그의 마음속 배타성이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양과 같은 그의 뒤에 서서 그를 인도하는 목자(牧者)의 수준이 의심스러웠고 때로는 미웠다. 만약 어떤 상황에서 그들이 절대적인 힘을 갖게 된다면, 그들의 교리에 순응하지 않는다면, 비록 가족이라고 할지라도 ‘신의 이름으로’ 목을 내리칠 것 같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섬뜩하였다.
초월적인 신을 그냥 믿을 수는 있어도 증명해 보일 수는 없다. 유한한 사람이 무한한 신을 마치 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타당하지도 겸손하지도 않은 태도이다. 같은 이름의 신을 불러도, 부르는 사람에 따라 신은 다른 얼굴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사람은 각자의 세상을 산다는 것을, 그 세상마다 믿고 의지하며 떠받드는 신적인 존재가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을까?
자신의 말과 행동이 불일치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자신의 배타적인 태도가 바로 예수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까? 알면서도 배타적이라면 개인적 집단적 이익을 위해 진실에 눈을 감고 양심을 버리는 것이다. 모르고서 배타적이라면 타자(他者)에 대한 증오와 두려움에 붙들려 있는 것이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모르는 청맹과니인 것이다.
나와 다정하게 지냈던 사람들이, 정말 아꼈던 사람들이 등을 보이고 멀어져 가는 경우가 여러 번 있었다. 단지 내가 자신과 똑같은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처음에는 그들이 사는 세상이 답답하였다. 나중에는 화가 났다. 시간이 흐르면서 슬퍼졌다.
사람의 생명보다 더 위에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신의 실존 여부를 잘 알지 못한다. 설령 신이 있다고 할지라도, 하필이면 다른 신이 아닌 그가 믿는 신을 내가 믿어야 되는 이유가 무엇이지? 그의 독선(獨善)은 도대체 어디에 근거하고 있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살면 되지 않을까? 그것이 그렇게 어려운가? 차라리 내가 싫어서 종교를 핑계 삼았다면 그들의 입장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쨌든 그들이 신앙의 이름으로 내게 교류의 문을 닫자, 나도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서 저절로 멀어졌다. 내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나를 단죄하려 한다면, 나는 예수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항의할 것이다. 그들이 예수 앞에서 회개하기를 원한다. 다른 종교인들에게 손을 내밀며 ‘형제여!’라고 말해 주기를 소망한다. 물론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참 이상하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라고 배우고,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심지어 원수까지도. 그런데 그들이 사랑해야 할 이웃에 타 종교인이 포함되지 않을 이유는 무엇인가? 바다는 강을 가리지 않고 받아들인다고 하지 않는가?
친척들을 비롯하여 가까이 지내는 개신교 신자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그들이 종종 내게 묻는 것이 있다. 양성애자 동성애자 성전환자 등 성소수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대개 그 질문에는 성소수자는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뜻이 숨어 있다. 그 질문으로 나를 시험에 들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내가 반문을 하곤 한다.
“만약 예수님이 여기에 계신다면, 예수님이 그 사람에게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하겠습니까? 아니면 ‘형제여, 이리 와서 나와 함께 밥을 먹읍시다.’라고 하겠습니까?”
누가 프란체스코 교황에게 물었다.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을까요?”
교황이 곧바로 대답하였다.
“물론입니다. 길이 다를 뿐 다른 종교에도 구원의 길이 있습니다.”
교황은 끊임없이 종교 사이의 대화와 화합을 도모하였다. 다른 종교인들과 함께 다정하게 어울리는 모습을 세상에 보여 줌으로써 종교 간 다툼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에 대한 과거의 박해에 대해서도 진심으로 참회하였다.
누가 달라이 라마의 의견을 물었다.
“제가 개종하여 불교 신자가 되고 싶습니다.”
달라이 라마가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지금 당신의 종교로 충분합니다. 굳이 불교로 바꾸실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보기에 두 분의 이야기는 그다지 특별한 것이 아니다. 너무도 당연한 말을 한 것이다. 배고픈 자에게 음식을 줄 때 숟가락으로 주는 것과 포크로 주는 것에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종교 간의 갈등이 워낙 심한 세상이기에 두 지도자의 언행이 특별해 보이는 것이다.
종교 간에 교리는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실천의 장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뜻은 일치한다. 병원의 의사는 환자의 종교를 따지지 않는다. 만약 종교를 따지는 의사라면 그는 좋은 의사가 아니다. 일상에서는 사랑이 곧 종교다.
**********
많은 성인(聖人)들의 말을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사랑하라.’
자기가 원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베풀지 말라.
고통받는 사람을 도와라.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
진실의 산에 오르는 길은 달라도
산 정상에서 만나는 것은
‘사랑하라’는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