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사랑하는 사람은 스스로 꽃이 된다.
2008년 여름, 함께 한문을 공부하던 사람들과 어울려 중국에 있는 공자의 유적지를 방문하였다. 산동성 곡부에 있는 공자묘와 태산을 거쳐 바닷가에 있는 도시인 위해(웨이하이)로 이동하였다. 위해에는 장보고가 세운 법화원이 있다.
산 중턱에 위치한 법화원에서는 발아래로 석도항을 내려다볼 수 있다. 눈을 들면 멀리 황해를 조망할 수 있다. 중국과 우리나라가 오랜 세월 동안 교류하며 지낸 바다라고 생각하니 친숙하게 느껴졌다. 그날은 날씨가 맑아 수평선이 유난히 멀고 넓게 보였다.
일행 중에는 박문여고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박 수녀님이 있었다. 나와 나이도 비슷하고 소탈하며 박식하여 대화가 편하고 즐거웠다. 수녀로 사는 것이 재미있는지, 수녀 교사에게 주는 급여의 수준은 어떤지(너무 낮은 급여에 깜짝 놀랐었다), 돈이 없을 때 보고 싶은 책이 있으면 어떻게 사서 보는지, 무례하게 여겨지는 허접한 질문에도 스스럼없이 응대해 주면서 농담도 건네는 너그러운 분이었다.
박 수녀님은 불교의 비구니, 가톨릭과 성공회의 수녀, 원불교의 정녀 등 각 종교의 여성 성직자들이 모여 종교 간 화합과 평화를 추구하는 삼소회(三笑會) 회원이었다. 진실한 신앙심은 서로 통한다고 굳게 믿는 분이었다.
먼 바다를 건너다보던 수녀님이 문득 내게 물었다.
“혹시 의상대사와 선묘 낭자 이야기를 아세요?”
“당연히 알지요. 선묘 낭자, 의상 스님을 무척 좋아했다는 아가씨. 의상 스님도 남자인데 혹시 그 예쁜 아가씨에게 마음이 있지 않았을까요?”
“뭐 그럴 수도 있지요.”
나의 장난기 어린 반문에도 수녀님은 가볍게 응대하였다. 수녀님이 말을 이었다.
“선묘 낭자가 스님께 드릴 법복을 지었는데, 안타깝게도 그걸 전하기 전에 의상 스님이 탄 배는 먼 바다로 나가버렸지 뭐예요.”
“스님이 참 무정하시네요. 좀 기다려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수녀님은 안경 너머로 바다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사랑했던 스님이 탄 배는 멀리 떠나버렸고, 선묘 낭자는 슬퍼서 울고.”
만약 선묘 낭자가 수녀님 옆에 있다면 눈물을 닦아주고 위로해 주거나, 같이 울어 줄 것 같은 분위기였다. 수녀님은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선묘 낭자는 간절하게 기도를 하였어요. 법복이 담긴 상자를 바다로 던지면, 그 상자가 배까지 갈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한 후 법복을 담은 상자를 멀리 떨어진 배를 향해 던졌어요. 놀랍게도 그 상자는 의상 스님이 타고 있는 배까지 날아갔어요.”
마치 법복이 담긴 상자가 먼 바다에 뜬 배로 날아가는 장면을 내게 전달하듯이 말하였다.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가는 수녀님이 순수하게 보이기도 하고, 소녀처럼 어려 보이기도 하였다.
“바로 이 자리가 그 자리인 것 같아요. 선묘 낭자가 바다를 향해 상자를 던지던 그 자리. 어쩐지 그래 보이지 않아요?”
수녀님이 눈을 크게 뜨며 감동 어린 표정을 지었다. 지금 막 그런 일이 일어났고, 또 눈앞에서 보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지 않아도 동그란 얼굴이 더 동그랗게 보였다.
“아니 수녀님, 수녀님은 그런 이야기를 믿으세요?”
“그럼, 선생님은 그 이야기를 안 믿으세요?”
내가 하하 웃었다. 수녀님의 반문(反問)이 장난처럼 여겨졌다.
“에이, 믿을 걸 믿어야지. 그걸 어떻게 믿어요? 그냥 옛날이야기지요. 옛날이야기.”
“정말로 믿지 않으세요?”
“당연하지요. 어떻게 믿어요?”
과학의 세례를 잔뜩 받은 내가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믿겠는가? 내게 그 이야기를 정말로 믿지 않느냐고 다그치듯 말하는 수녀님의 속내를 알 수 없었다.
수녀님이 정색을 하면서 단호하게 말하였다.
“그래서 당신은 신앙인이 될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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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손길은 친절하고
눈길은 따뜻하다.
말은 향기롭고
마음은 밝고 맑다.
사랑하는 사람은
스스로 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