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마음의 자녀들
학생인 나를 곤란하게 만드는 것 중의 하나는 어버이날 부모님께 감사의 편지를 쓰라는 과제였다. 내가 편지를 보내고 싶은 사람은 어머니였지만, 그 편지를 받아 줄 어머니는 세상에 없었다. 편지를 받을 수 있는 아버지는 미움의 대상이었다. 함께 살지도 않았다. 내 마음은 고아였다.
옆에서 열심히 감사의 편지를 쓰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말썽꾸러기 친구들도 그날만큼은 효자가 될 수 있었다. 어버이날은 내가 불효자임을 확인하는 날이었다. 나는 감사의 마음은커녕 증오심만 더 키우는 불량 학생이었다. 부모의 사랑을 받은 만큼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고 한다면, 나는 사랑이 아주 적은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꽃밭의 꽃을 키운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부족하면 수돗물을 주면 된다. 내게 하늘의 비는 부족했지만 수돗물은 많이 주어졌다. 외할머니를 비롯하여 많은 여자들이 엄마가 되어 주었다. 주변의 여러 남자들이 나의 아버지가 되어 주었다. 법성의 작은어머니는 어머니와 함께 동고동락(同苦同樂)하며 시집살이를 했던 기억을 소중하게 여겼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평생 동안 나를 ‘마음의 아들’로 삼아 주었다. 단지 아들의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친구 엄마들은 추운 겨울에 따뜻한 곳에서 잠잘 수 있게 해 주었고 먹을 것을 챙겨 주었다. 때에 따라 고모 이모 삼촌이 부모 역할을 해 주었다. 밥을 해서 먹여주고 옷을 빨아 입혀주었다. 아프면 치료해 주었다. 부모의 젖은 부족했지만 나는 결코 사랑에 굶주리지 않았다.
혈육의 부모는 중요하다. 마음의 부모도 중요하다. 꿈도 중요하다. 고등학교 시절 수렁에 빠진 나를 붙들어 건져낸 것은 꿈이었다. 그 꿈이 이루어져 교사가 되었다. 방황하는 청소년들의 손을 붙들어 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나에게 ‘마음의 자녀들’이 생겼다. 나는 마음의 부모가 되었다. 교단에서 때로는 아빠가 되고 때로는 엄마가 되었다.
잘 자라는 자녀들은 부모를 살맛나게 한다. 잘 자라는 학생들은 교사를 살맛나게 한다. 봄에 새롭게 맞이한 학생들은 겨울이 되면 쑥 자라 있었다. 그들은 나를 살맛나게 했다. 작물을 기르는 농부 역시 그런 기르는 재미를 느끼지 않을까? 제법 긴 세월 동안 사랑이 의무인 교사 생활을 통해 마음의 부모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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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무조건적인 사랑은 안식처이다.
아버지의 조건적인 사랑은 교육장이다.
우리에게는 안식처와 교육장 모두 필요하다.
품어 기르되 때가 되면 내보내야 한다.
미숙할 때는 보살피되
성숙하면 스스로 자기 길을 찾게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