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사랑은 신이다.
고사리 손에 힘을 주어 가게 문을 열었다. 드르륵거리며 격자형의 유리문 열리는 소리가 요란하였다. 밝은 낮임에도 천장이 낮은 가게는 조금 어두웠다. 여덟 살의 내 키와 비슷한 크기의 가게이모가 환하게 웃으며 슬리퍼를 끌고 나왔다.
“우리 종구 왔네. 무얼 사러 오셨을까?”
“초하고 향이요.”
긴 수염의 세종대왕이 그려진 백 원짜리 파란 지폐를 내밀었다. 가게이모는 초와 향을 신문지로 싸 주었다. 거스름돈도 내 손에 쥐어주었다.
가게이모는 꼽추였다. 그녀의 부모님은 배 과수원 주인이었다. 장애인이 된 딸이 천대받지 않고 살게 하려고 노안 태평사 입구의 과수원을 물려주었다. 바로 그 과수원 옆 길가에 가게도 마련해 주었다.
시골가게답지 않게 제법 큰 규모의 가게였다. 아가씨는 영리하여 가게를 잘 운영하였다. 작은 키에 옆으로 퍼진 몸이 거북이를 연상시켰다. 높은 어조로 조리 있게 말도 잘하고 이목구비도 또렷하였다. 밝게 웃으면 장애인이 아닌 작고 뚱뚱한 여중생처럼 느껴졌다.
내가 중학생일 때 그녀가 결혼을 하였다. 놀랍게도 남편은 나도 잘 아는 이웃 동네 미남 총각이었다. 그는 가게에 자주 들렀다. 서로 의견이 잘 맞았던 모양이다. 주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혼사를 진행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딸을 낳았다. 그들의 사랑이 열매를 맺은 것이다. 딸은 잘 생긴 아빠를 닮았다. 누가 봐도 고운 용모를 지닌 아이였다. 딸은 엄마의 꿈이고 자랑이고 살아갈 이유였다. 아이는 잘 자랐다. 그러나 그녀의 봄날은 오래가지 않았다.
남편이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과수원에 대한 명의를 자기 이름으로 바꿔달라고 요구하였다. 부인은 남편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물론 남편은 자기를 믿어 달라고 했을 것이다. 반면에 부인은 남편이 가정을 버릴까 두려웠을 것이다. 부부싸움이 계속되었다. 남편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끝내 두 사람은 이혼을 하였다. 딸은 엄마 곁에 섰다. 남편은 가족과 고향을 떠났다.
나는 궁금했다. 남편이 진정으로 원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돈이었을까? 돈에 대한 탐욕을 사랑이라는 포장 밑에 숨긴 것은 아니었을까? 그에게는 아내와 딸의 행복과 돈 중 어느 것이 더 소중했을까?
그 무렵 나는 매년 몇 차례씩 외갓집에 갔었다. 그때마다 그 가게를 들렀다. 근처에 마땅한 다른 가게도 없었고 친숙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나를 늘 반갑게 맞아 주었다. 한동안 그녀의 이혼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이혼 후에도 그녀의 표정이 그다지 어둡지 않았기 때문이다. 딸은 학교 수업이 끝나면 엄마 일을 도왔다. 예쁘고 똑똑하였다.
자기를 닮은 딸이 보고 싶었을까? 남편은 가끔 가게에 들렀다. 딸은 아빠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하지만 엄마는 딸을 타일렀다. 딸의 성(姓)은 여전히 남편의 성이었다. 엄마는 딸이 자기 아빠와 좋은 관계를 맺기를 원했다. 딸의 사촌들이 오면 엄마는 살갑게 대했다. 친척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길 원했던 것이다.
어느 해에 가게를 찾았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밝고 동그랗던 그녀의 얼굴이 작아져 있었다. 기미가 잔뜩 쌓인 얼굴은 어두운 갈색이 되어 있었다. 가게의 물건 종류도 양도 현저하게 줄어 있었다. 까닭이 궁금했지만 감히 묻지 못했다. 나의 놀란 눈과 얼떨떨한 표정을 보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딸이 죽었어.”
어느 날 다른 지역에서 대학에 다니던 딸이 밤중에 전화를 했다. 두통이 매우 심하다고. 밤이어서 큰 병원 응급실로 가라고 당부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딸이 가겠다던 병원으로 서둘러 갔다. 하지만 딸은 이미 저 세상 사람이었다. 급성 뇌수막염이 딸을 데려간 것이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빛이 사라진 것이다.
**********
신앙인은 자신의 뜻이 아닌
신의 뜻에 따라 산다.
신의 뜻을 따라 살 때
자기를 초월하여 거룩한 세상으로 들어간다.
당신이 믿고 의지하며 순종하는 대상이
바로 당신의 신이다.
당신의 제단(祭壇)에는
어떤 신이 있는가?
마음의 제단에 사랑을 모시는 자에게는
사랑이 신이다.
언제 어디서나 당신이 믿고 의지할만한
당신을 구원해 줄 궁극적인 신은
사랑의 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