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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걍보리 Jul 24. 2023

숲길에서

2. 만다라

  하얀 종이만 남았다. 채워졌던 것들이 사라지자 텅 비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종이 위에서는 시간이 멈추었다. 

  긴장이 풀리자 해방감과 허무감이 교차하였다. 내 삶의 끝자락에서도 이런 느낌이 들까? 잘 모르겠다.      


  백색의 종이를 마루 위에 깔았다. 나와 그녀, 두 사람 앞에 펼쳐진 신문 두 장 크기의 전지(全紙)는 진갈색의 마룻바닥과 대비되어 순결하게 빛났다. 흰 종이는 검은색 원점을 찍으려는 연필의 접근에 저항하였다. 순간 머뭇거렸다. 

  원점을 찾았다. 그것을 중심으로 큰 원을 그렸다. 작업을 시작하였다.

  진행자는 작업하는 동안 말을 하지 말라고 참여자들에게 요청했다. 가능하면 작업 자체에만 마음을 집중하라고 하였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조용히 손을 들면 진행자가 와서 도와주었다. 각 조를 2인 또는 3인으로 구성하였다. 

  나와 함께 작업을 한 사람은 이번 모임에 와서 처음 만난 사람이었다. 낯선 사람과 공동작업을 하는 것은 새로운 세상으로 여행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잠깐 눈을 마주친 뒤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눈인사를 나누었다.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를 모르기에 어떤 모양의 작품이 만들어질지 짐작할 수 없었다. 상대방 역시 막연하지 않았을까? 새로운 상황의 전개에 대한 호기심이 없다면 답답하고 별로 즐겁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먼저 원 안에 나무 형상을 그렸다. 중앙을 향하여 자라는 형상의 곡선을 그렸다. 내가 그린 형상을 바라본 뒤 그녀가 자기 앞부분에 몇 개의 곡선을 그렸다. 흐르는 강물 같기도 하고 부드러운 물결 같기도 하였다. 그녀가 그리기를 마친 뒤 나는 나무 형상 위로 태양과 달을 떠올리게 하는 크고 작은 원 두 개를 그렸다. 뒤이어 그녀가 꽃을 떠올리는 문양 몇 개를 큰 원의 양쪽에 배치하였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생각일 뿐이었다. 그녀가 원하는 그림이 어떤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내가 그린 선들과 그녀가 그린 선들이 조화를 이루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었기에 나는 내가 원하는 형상을 그려나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은하수를 상상하며 원의 왼쪽 바깥 선에서 원점 근처를 지나 오른쪽 바깥 선에 이르는 커다란 곡선을 단숨에 그었다. 내가 그리기를 마치자 그녀의 차례가 되었다. 그녀는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원의 이곳저곳을 겨누어 보았다. 자신이 원하는 형태나 꿈꾸는 세상과는 다른 형상이 그려져서 불편한 것일까? 

  무슨 생각을 한 것일까? 그녀가 나와 종이를 번갈아 보면서 손으로 긴 선을 그려 보였다. 내가 그린 도형들 영역으로 들어갈 것이니 양해하라는 것 같았다.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고개를 위아래로 두어 번 끄덕였다. 그녀가 허리를 굽히고 손을 뻗어 내가 앉아 있는 근처까지 연필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을 따라 떡갈나무 잎 모양을 한 부드러운 곡선이 좌우로 흘러내렸다. 그 두 개의 선이 새롭게 그어지자 애초에 내가 구상했던 형태는 단번에 무너져버렸다.

  이게 뭐지? 뭔가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내 차례가 되었지만 어디에 어떤 모양을 그려 넣어야 할지 막막하였다. 내가 어떤 형태를 원했었는지조차 얼른 기억나지 않았다. 설령 다시 기억이 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많은 선들이 얽히고설킨 가운데 본래 원했던 형태를 도저히 다시 그릴 수 없게 되었다.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기는 이미 틀린 것 같았다.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자 나도 모르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문득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먼저 양손을 가슴께로 올려 잠시 멈추자는 메시지를 그녀에게 보냈다. 그리고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손가락질을 하였다. 동의 표시가 왔다. 둘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양 옆구리에 두 손을 댄 뒤 가슴을 폈다. 고개도 뒤로 젖혔다. 그런 다음 고양이 걸음으로 주변 사람들의 선 그리기 작업 상황을 둘러보았다. 

  어떤 조는 직선을 많이 사용하여 피라미드나 탑 모양을 구성하고 있었다. 기하학적 형상이 멋있어 보였다. 어떤 조의 밑그림은 누군가가 미리 계획을 세워오기라도 한 것처럼 일관성이 있게 그려져 있었다. 그 자체만으로도 멋이 있었다. 반면에 어떤 조의 것은 선들이 뒤죽박죽이었다. 무엇을 그리려고 하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것도 있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우리 조의 밑그림도 남들에게는 그렇게 보일 것 같았다. 그녀 역시 같은 생각이었을까? 우리는 제자리로 되돌아왔다. 밑그림을 살피던 그녀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흰 이를 드러내며 힘없이 웃었다.

  나의 구상과 그녀의 의도가 어긋난 상황을 되돌릴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통일된 모양을 그려낼 수 없다면 선과 면들이 균형이라도 잡아야 할 것 같았다. 선들이 촘촘하게 밀집된 영역을 피해 허전해 보이는 공간을 타원과 직선으로 보완하였다. 그녀가 곡선 두어 개를 덧붙인 뒤에 밑그림을 마무리하였다.

  밑그림을 옆에 두고 종이컵 안에 하얀 꽃소금을 반쯤 채웠다. 커터 칼로 파스텔을 살살 긁어 가루를 낸 뒤 소금과 섞었다. 가루를 많이 섞으면 진한 색이, 적게 섞으면 연한 색이 나왔다. 다양한 색깔의 색 소금을 고루고루 만들었다. 내가 색 소금을 만든 뒤 물티슈로 손을 닦을 때, 그녀는 파란색 소금을 자기 앞의 도형 위로 올리기 시작했다. 형광 빛을 내는 맑은 파란색이 눈부셨다. 검은색 연필 선만 있을 때는 그저 그렇게 보이던 공간이 파란빛을 내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조금 힘이 났다.

  나는 맨 처음 나무 몸통을 염두에 두고 그린 영역에 짙은 오렌지색 소금을 깔았다. 종이컵 입구를 조금 오므린 뒤에 나무젓가락으로 색 소금을 살살 쏟아부었다. 나무 옆 두 개의 원 중, 왼쪽 원에는 붉은색 소금을, 오른쪽 원에는 하얀색 소금을 조심스럽게 올렸다. 주변으로 흘러내린 색 소금은 젓가락을 이용하여 원 안으로 밀어 넣었다. 소금 양이 너무 많다 싶으면 아이스크림 스푼으로 다시 덜어내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오로지 작업에만 몰두하였다.

  전체를 조망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자리에서도 살펴보고 옆에서도 보고 반대편으로 가서도 관찰했다. 때깔 고운 색 소금이 빈 공간에 채워지면서 구성의 엉성함이 가려지는 것 같았다. 기대하지 않았던 효과였다. 형태의 어울림도 중요하지만 색깔의 어울림도 중요한 것 같았다. 전체를 보자 색깔의 편중이 눈에 띄었다. 대체로 무거운 분위기였다. 

  나는 연두색과 하늘색 소금을 만들었다. 그녀도 그런 것을 눈치챈 것일까? 연노랑과 분홍색 소금을 만드는 것 같았다. 새로 만든 색 소금으로 이곳저곳 작은 빈 공간을 채웠다. 숲 속에 작은 꽃들이 피어나는 것처럼 보였다. 이쑤시개와 젓가락을 이용하여 면과 면 사이의 흐트러진 테두리를 정돈하였다. 큰 원 주변에 떨어진 소금들을 치우고 작업을 마무리하였다. 그런대로 보기에 괜찮았다. 그녀의 입가에도 가벼운 미소가 번졌다. 예상보다 나쁘지 않은 것 같다는 뜻일까?  

  그녀가 휴대폰을 꺼내더니 위치를 바꾸어 가면서 사진을 찍었다. 나도 두세 장의 사진을 찍었다. 옆 사람들이 우리 작품을 보러 왔다. 우리도 다른 사람들 작품을 보러 다녔다. 어떤 작품은 매우 아름다웠다. 미술 전문가들인가? 가장 놀라웠던 것은 밑그림이 아주 엉성해 보였던 것들도 색 소금이 올라가자 그런대로 볼만했다는 것이다. 그런 작품을 만든 사람들의 표정에는 ‘그런대로 다행이다.’가 쓰여 있었다. 보기에 좋았다.

  진행자의 지시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참여자들이 제자리로 가서 앉았다. 조용한 가운데 각자의 작품을 바라볼 시간을 주었다. 뒤이어 합장을 하고 작품에게 인사를 하게 했다. 고별 의식이었다. 마지막으로 테두리의 색 소금을 가운데로 밀어 넣게 했다. 종이 가운데에 소금 산이 만들어졌다. 작은 색 소금 입자들이 뒤섞이자 전체가 진보라색을 띠었다. 그 소금 산에 한 번 더 인사를 올렸다. 

  뒤섞인 소금을 미리 준비한 비닐봉지에 담았다. 종이를 다시 펼쳤다. 희미해진 실선들만 남은 종이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시간이 멈춘 종이를 보았다. 잠깐의, 아주 잠깐의 침묵 속에서 해방감과 허무감을 동시에 느꼈다. 작업의 시작에서 끝에 이르는 과정이 주마등처럼 흘렀다.    

  종이마저 접어서 정리한 뒤에 진행자는 작업 과정이나 결과에 대해 각자 느낀 점을 말할 기회를 주었다. 비로소 입을 열어 말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너무 막연해서 조금 긴장했었고, 중간에는 작품을 망칠 것 같아 당황했으며, 마지막에는 그런대로 괜찮았다고 말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는 들을 만했다. 나와 비슷한 점도 있었지만, 생각의 차이가 너무 커 놀라기도 했다. 

  네 시간에 걸친 만다라 작업이 끝났다.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또 다른 만다라의 세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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