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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걍보리 Aug 05. 2023

숲길에서

4. 하늘

  본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아야 한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체를 하는 것은 정직하지 못한 태도이다. 물론 내가 말하려는 것은 ‘하늘’이어서 전혀 모른다고 할 수도 없다. 그렇지만 어쩌다 한 번씩 분위기를 내기 위해 포도주를 홀짝대는 내가 나이 든 소믈리에 앞에서 싸구려 포도주 한 잔을 마시면서 이러쿵저러쿵 포도주 맛에 대해 떠들어 댄다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문득 하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우스꽝스럽게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냥 입을 다물어버리려고도 했다. 세상에는 전문적인 천문학자도 있고, 아마추어 천문학자들도 많다. 날마다 하늘만 보고 사는 기상관측자도 있고, 밥 먹고 숨을 쉬듯 하늘과 바람을 수시로 가늠하며 사는 어부들도 있다. 내가 하늘에 대해 말한다면 그들이 비웃을지도 모른다. 네가 하늘을 알면 얼마나 알겠느냐고. 

  그래도 용기를 내서, 아니 어쩔 수 없이 한 마디 하고 싶은 충동을 이길 수 없다. 어떤 유행가의 가사처럼 좋은 걸 어떡하겠는가? 그걸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은 걸 어찌하겠는가? 

  만약 누군가가 나의 사랑을 증명해 보이라고 하면 조심스럽게 약간의 근거를 내보일 수 있다. 내가 찍은 사진의 대부분은 하늘이니까.

  하늘은 눈만 들면 언제나 거기에 있다. 너무 익숙하여 우리는 마치 하늘이 없는 것처럼 산다. 그러나 하늘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라. 바로 거기가 지옥이 아니겠는가? 어찌 보면 하늘은 한시도 쉬지 않고 추락하는 우리를 구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천신(天神)은 하늘에 있는 신령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전의 말이다. 나는 하늘이 곧 천신이라고 말하고 싶다. 하늘 뒤에 숨어 있는 또는 보이지 않는 그런 존재를 굳이 상정하지 않아도 된다. 소박하게 생각해 보건대 신앙과 종교의 출발점은 하늘이 아니었을까? 하늘이 없었다면 신의 존재를 어떻게 느낄 수 있었겠는가? 하늘은 손에 잡힐 것 같으면서도 결코 잡히지 않는다는 점에서, 늘 곁에 있으면서도 범접할 수 없는 신비한 아우라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종교에서 말하는 신을 닮았다.  

  하늘은 만물을 빛나게 만들어 주는 배경이다. 하늘이 없는 파도치는 바다를, 하늘이 없는 다도해의 작고 귀여운 섬들을, 하늘이 없는 굽이치는 산과 들을, 하늘이 없는 나무를, 집을, 사람을, 꽃을 상상해 보라. 아무것도 아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하늘에 기대지 않고 그 자체로 빛나는 것은 없다.

  언덕에 서서, 나뭇잎 사이로, 창가에서, 달리는 차 안에서, 길을 가다 잠시 멈춰 서서 나는 하늘을 본다. 하늘은 언제나 자신을 보여준다. 숨기는 법이 없다. 다양한 표정과 색깔로. 거짓이 없다. 순수(純粹)라는 말은 하늘에 합당한 말이다. 신부의 흰 드레스나 이슬에 젖은 꽃잎의 순수는 하늘의 순수를 본받은 것이다.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는 말이 아름답고 거룩하나 말로 하기 어려운 것을 형용할 때 쓰는 말이라면 하늘에 어울리는 말이다. 하늘은 경건한 신비로 뻣뻣한 고개를 숙이게 한다. 영감(靈感)의 원천이자 영혼의 귀의처다. 내가 얼마나 작고 작은 지를, 미천한지를 말해준다. 그런다고 슬픈 것이 아니다. 작아지면 작아질수록 도리어 기쁘고 충만해진다. 그 점에서 하늘은 신이다.

  하늘은 일체의 비교와 차별을 쓸어버린다. 눈을 뜬 사람이라면 하늘 앞에서는 감히 키재기를 하지 않을 것이다. 너도 나도 한 점 티끌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늘은 탐욕이 부질없다고 말해준다. 들끓는 불길을 식혀준다. 침묵 속에서 나의 어리석음을 꾸짖는다. 야단을 맞는다고 불편해지지 않는다. 도리어 그 순간 순해지고 편해지고 가벼워진다. 하늘은 나를 오만에서 끌어낸다. 이웃에게 겸손하라고, 만물에 겸허하라고 명령한다. 나는 순종할 수밖에 없다.  만인은 평등하다는 하늘의 말을 경청한다. 기꺼이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히며 무릎을 꿇는다. 우리 모두는 같은 하늘을 머리에 이고 사는 죽어가는 존재들이다.

  영공(領空)이라는 말은 그럴듯하면서도 전혀 그럴듯하지 않은 말이다. 로켓으로 미사일로, 여객기와 전투기로 하늘을 정복한 것처럼 구는 사람들을 보면 때로는 우습고 때로는 답답하다. 그들은 자신들이 관념의 우리 안에 갇힌 줄 모르고 떠들어 댄다. 불손하게도 신성모독(神聖冒瀆)에 가까운 헛소리를 한다. 하늘을 어떻게 정복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고난에 빠진 사람들을 달래준 것은 엄숙한 종교 교리가 아니라 하늘이었다고 생각한다. 갑돌이와 갑순이가, 과부와 홀아비가, 사탕수수밭의 노예가, 조선의 노비가 모진 삶을 꿋꿋하게 살아낼 수 있었던 까닭은 하늘을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책에만 코를 박고 지내는 이 땅의 수험생들은 사탕수수밭의 노예보다도 불행한 시간을 지내고 있다.  

  누군가의 위로를 받고 싶으나 그런 누군가를 곁에 두지 못한 사람은 하늘을 보라. 위로를 받을 것이다. 

  평안을 얻고 싶으나 평안이 허락되지 않는 사람은 하늘을 보라. 평안을 얻을 것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진실을 하소연하고 싶은 사람은 하늘을 보라. 침묵 속에서 진실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한이 풀릴 것이다.

  모든 것을 잃고 아무런 희망도 없이 어둠에 잠긴 사람은 하늘을 보라. 또 다른 출발점에 섰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우쭐대며 큰 소리를 내는 사람은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 거울을 보듯 부끄러움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하늘이 준 은총임을 아는 사람은 행복할 것이다. 

  단언컨대, 사람은 하늘을 보는 만큼 사는 것이다. 그만큼 사람답게 사는 것이다. 나의 소박한 꿈은 늘 하늘을 보며 사는 것이다. 하늘만 보면서 살다 죽을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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