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폭풍
2008년 한 전시회에서 우연히 만난 ‘폭풍’이라는 그림에 붙들려 얼이 빠진 채 꼼짝 못 한 적이 있었다. 화가는 제주 바다의 폭풍을 그려 보여주었지만, 나는 내 내면의 폭풍을 보고 있었다. 그 화가는 변시지다.
그는 제주도의 자연과 역사, 토속적인 삶을 황토색과 먹색으로 그렸다. 얼핏 보면 그림은 매우 단순하다. 하늘도 바다도 온통 황톳빛이다. 황토색 세상에 몇 가닥 검은 먹색이 더해진 단순한 그림. 그 그림 세상에는 일렁이는 파도 소리, 휘몰아치는 바람 소리, 말들의 헐떡임, 까마귀의 비명, 사람들의 신음이 가득하다. 그 요란한 아우성 속의 침묵과 고독.
그의 그림 속에서 제주 바다 폭풍과 내 안의 격정 폭풍이 공명하였다. 변시지의 폭풍 그림에는 내가 있었다. 그의 작품에는 그의 마음이 들어 있으니, 필시 그의 가슴에도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었으리라. 어디 그 폭풍이 제주도 바다에만 불겠는가? 변시지에게, 나에게, 그의 그림 앞에 선 모든 이에게 불 것이다. 그 점에서 그의 폭풍 그림은 가장 변시지답고 제주다우면서도, 모든 사람에게 통하는 보편성을 드러낸다. 한 철학자의 입을 빌려 말하면, 변시지의 폭풍 그림은 진실 자체다. 진리다.
나는 오래전 처음으로 그의 그림을 만났을 때, 바로 그때의 감동을 기쁘게 간직하고 산다. 제주도에 갈 때면 서귀포에 있는 기당 미술관을 경건한 기분으로 들른다. 마치 성지를 방문하는 순례자처럼. 주변 사람들에게도 그의 그림을 소개한다. 마치 큰 선물이라도 그에게 전해주는 것처럼 의기양양한 기분으로.
아무도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살 수 없다. 표출하지 못한 기분은, 억눌린 기분은, 변형되고 뒤틀려 병적 증세로 발현한다. 변시지의 폭풍 그림은 억눌린 감정을 분출하는 통로를 열어준다. 짐승의 심성을 순화시켜준다. 그의 그림을 통해 나도 숨어있던 격정을 풀어낸다. 분노로 끅끅대며 숨 막혀 살던 내가 숨을 내쉴 수 있게 된다. 폭풍 그림은 나를 위로하고 다독인다.
종종 휴대폰을 열어 변시지 그림을 감상한다.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제주의 바람과 파도 소리가 들려온다. 그의 그림은 음악이자 한 편의 시다. 변시지의 그림을 만난 것은 행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