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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이라는 인간의 의무

허구의 성장?

by 낙서




장례식은 죽음에 대한 직면일까, 회피일까




오늘 나눌 주제는 상실입니다.


다들 살면서 장례식 한 번 즈음은 다녀온 적 있으시겠지요. 결국 언젠가는 다 두고 떠나야하는게 우리네 삶이라 그렇습니다. 어떤이의, 어떤 장례였는지는 감히 여쭙지는 않겠다만 그때의 식 풍경에 대해 여쭤보고 싶네요. 우리는 그를 떠나보내고 있었나요, 혹은 기억하기 위해 애쓰고 있던가요?








개인과 사회는 죽음으로도 분리될 수 없는가




떠난 이는 더이상 머무르지 않는데 장례식이 열립니다. 이미 혼은 떠났는데 그들은 무엇을 붙잡고 싶어 49재라는 명목으로 실오라기 하나까지 겨우 붙잡을까요. 남겨진 이들은 그리도 욕심이 많아 망자가 볼 수도 없는데. 울고, 밥을 먹고, 절을 하고, 하얀 국화 한 송이 올리고, 신에게 혼이 무사히 도착하여 위로 받기를 기도합니다. 이승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장례식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죽음을 위해 우리는 미리 장례식장과 관을 짜두어야 한다네요. 그래서 치열하게 돈을 벌고, 내 장례식에 올 사람들을 많이도 만들어두어야 합니다. 성대한 장례식을 위해서는 이번 생에 많은 것들을 축적해두어야만 한답니다. 그것들 중 우리가 들고 갈 수 있는 것은 단 한가지도 없는데. 우리는 '잘 죽을' 준비를 하기 위해 오늘도 노동을 해서, 돈을 벌고, 지겹도록 윗사람들의 시중을 들고, 어디 근사한 1인실 병실에 들어가기 위해, 교통 좋은 장례식장에 들어가기 위해. 납골당 가장 손 닿기 편한 중앙 자리에 허옇게 타버린 가루들을 얹기 위해. 치열하고도 아주 지겹게.


우리는 급을 올리기 위한 청년기, 일련의 부와 명예를 잡은 중년기, 그리고 자식들을 성공시킨 훌륭한 노년기를 보낸 후 차분하고도 깔끔한 병실 한 칸에 들어설 것입니다. 그 이후에 죽을거예요.


적어도 우리는 아직 영정사진을 미리 찍어둘 나이는 아니니까요.


아,


정말 그렇던가요?


우리의 죽음은 이리도 계획적으로 흘러가던가요?








상실에 정해진 나이는 없습니다.




인간에게 상실은, 실은 의무인지라


우리는 지겹도록 지지고 볶고, 울고 웃다


하염없이 떠나 보내고, 밀려 들어오고


끝도 없는 상실 속에서


우리는 무엇에 부딪히고, 무엇에 도망쳐야 할까요?






이천이십오년 삼월의 어느날, 스물다섯의 다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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