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을 왜 시작했냐면요
원대한 꿈도, 심오한 철학도 좋지만
번역가가 되겠다고 선언한 후 한동안은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많이 받았다. 내 주변에서는 흔치 않은 직업군이라 신기하기도 했을 거고, 덕업일치가 이루어지는 삶이란 어떤 건지, 자격증도 뭣도 없는 내가 대체 어디서 어떻게 시작하고 있다는 건지 꽤나들 궁금했던 모양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걱정도 일부 있었을 거다. 대학교 때 내 영문과 학부 성적이 그렇게 좋은 편도 아니었단 걸 대부분 알고 있었으니. 하지만 천만다행으로 음성학이나 통사론은 번역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거의 경험담 아니면 후기와 관련된 것들이라 그런 질문에 답해 주는 건 딱히 어렵지 않았다. 별 경력이 없어서 대학생 때 대외활동 내용까지 이력서에 넣었고, 포트폴리오 몇 개 만들어서 돌렸고, 대충 그런 얘기를 두서 없이 늘어놓으면 대부분은 만족해 했다. 그런데 혹자는 면접관에 빙의해 나한테 아주 곤란한 질문을 하기도 했다.
"번역을 시작한 계기가 뭐야?"
"너는 번역이 뭐라고 생각해?"
"어떤 번역가가 될 거야?"
아마 이런 류의 질문을 하는 사람 중 열에 아홉은 소위 잘나가는 번역가들의 인터뷰 기사, 영상, 혹은 웹상에서 접할 수 있는 경험 많은 번역가들의 글을 한 번쯤은 본 적이 있는 사람일 것이다. 물론 나도 많이는 아니지만 그런 컨텐츠를 한번씩 접하기도 한다. 그들은 워낙 언변도 뛰어나고 필력도 좋은 데다 오랜 기간 일하며 확고한 철학까지 축적한 사람들이라 자신들의 번역관, 경험담 등을 정말 유려하게 풀어 낼 줄 안다.
"우린 사실 모두 번역가다"라든가, "번역은 식기(食器)와도 같다"라든가. 내 짧은 경험과 생각으로는 도저히 떠올리기 힘든 심오하고도 소위 '무릎을 탁 치게' 하는 표현이 참 많고,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많은 걸 생각해 보게 만든다. 내 친구들이자 면접관들도 내 나름대로의 답을 기대하고 저런 걸 물어본 것이리라.
그리고 안타깝게도, 난 나만의 작은 면접관들이 지쳐서 스스로 포기할 때까지 그들을 만족시켜 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내 저주받은 말주변과 변변찮은 경험으로 다른 번역가들처럼 멋들어진 표현을 떠올리고 가치관을 설명하는 건 무리였을뿐더러, 애초에 번역이라는 일 자체를 원대한 꿈이나 깊은 철학을 가지고 시작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시작은 참으로 별것 없었다. 숭고한 직업 의식이나 그런 게 아니라, 그저 대학교 대외활동에서 접해 본 번역 공부가 생각보다 꽤나 재밌었어서. 작은 불씨처럼 생긴 그 관심이 훗날 번역 알바 기회가 들어왔을 때 내가 망설임 없이 도전한 계기가 됐고, 그때 벌었던 8만 원 남짓한 돈이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내 번역가 도전기의 시작점이 됐다.
뭔가를 시작할 때 가장 중요한 건 어쩌면 그저 그러한 작은 관심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내가 번역을 시작할 땐 그랬다. '나는 꼭 이 일을 해야만 해'와 같은 부담스럽고 무거운 생각이 아니라, '생각보다 재밌는데? 조금 더 파 볼까?' 하는 그런 작은 관심. 그 조그만 애정에 조금씩 부채질을 해 주다 보면 운 좋게도 내가 평생에 걸쳐 사랑할 일을 마침내 찾게 될 수도 있다.
남들처럼 생각이 깊지도 못하고 말주변도 시원찮은 나는 위의 저 질문들에 평생 제대로 된 답을 해 줄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딱히 상관없다. 애초에 내 시작점은 번역을 향한 작은 관심과 애정이 다였고, 바라는 점이 있다면 이 두 가지를 최대한 오래 가지고 갈 수 있었으면, 그래서 이 일을 최대한 오래 좋아할 수 있었으면 한다는 것뿐이다.
내 바람과는 달리 생각보다 일찍 이 일을 놓게 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또 다른 일을 찾을 것이다. 나라는 사람이 늘 그랬듯 별생각 없이, 복잡한 프로세스도 없이. 늘 스스로에게 던질 질문은 딱 하나다. '해 보니까 재밌던?'